얼마 전 이세돌 사범과 저녁 자리를 같이하는 '영광'을 누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2016년 인공지능(AI) 알파고와의 바둑 맞대결에서 1승을 거둔 최초이자 마지막(?) 인류, 이세돌 사범과 식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열혈 바둑 팬인 저는 당시 이세돌 사범의 승리를 확신했었지만, 뜻밖에도 AI에 3연패를 당하는 모습을 보고 대국장으로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마침 구글 딥러닝으로 알파고를 개발한 데미스 하사비스를 행사장에서 마주쳐 '불공정한 게임'이라고 따졌습니다.
알파고는 이세돌을 철저히 사전에 연구한 반면, 이세돌은 알파고의 정체를 몰랐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이세돌은 혼자 싸운 반면 알파고는 수 천대의 컴퓨팅 서버와 연결해 대국을 했으니 공정하지 않다는 게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하사비스는 다소 상기된 얼굴로 “바둑처럼 어려운 두뇌게임을 AI가 할 수 있다면 자동차 운전이나 의료 행위 같은 것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을 따름”이라며 “인간을 모욕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역설하더군요.
이세돌 사범에게 그때 일화를 전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습니다.
“만약 그때 알파고를 제대로 알았다면 1승 정도는 더 거둘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이제는 인간과 AI의 격차가 훨씬 커져서 호선 바둑으로 이길 사람은 지구상에 없을 것 같아요.” 그의 말처럼 알파고 이후 등장한 알파고 제로는 인간의 기보 대신 스스로 바둑을 학습, 엄청난 속도로 천하무적에 오른 걸 입증하고 곧바로 바둑계에서 은퇴했습니다.
이세돌의 뒤를 이은 신진서 사범은 다른 AI를 통한 학습에 힘입어 인간계 바둑 1인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지요. 불과 몇 년 사이에 바둑과 AI의 공생은 이제 아주 평범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제가 맡고 있는 탄소중립 녹색성장 분야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것도 두 얼굴로 말입니다.
하나는 AI가 엄청난 전기를 쓰면서 온실가스 배출을 늘리는 새로운 주범이 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면에서는 AI가 기후 에너지 솔루션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세돌 사범 얘기를 잠깐만 더 해볼까요.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알파고의 소비전력은 170㎾ 정도. 이는 성인의 뇌가 사용하는 평균 20w에 비하면 8500배에 달하는 수준입니다. 이세돌 사범이 대국 중 섭취했다는 커피와 바나나는 계산에서 뺐습니다만, AI가 에너지 먹는 공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에너지 효율 면에서 인간의 뇌를 닮은 '뉴로모픽' 연구가 그래서 중요합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AI와 에너지 커플링'을 주제로 한 최근 보고서에서 구글이 사용하는 전체 에너지 사용량에서 머신러닝이 차지하는 비중이 15%에 달할 정도라고 밝혔는데, 실제로는 그 이상으로 보는 시각도 많습니다. 특히, 격돌하는 AI 혁명으로 데이터센터 급증 등 앞으로의 전기 수요는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합니다. 이 수요를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도 큰 문제지만 석탄, 가스와 같은 화석연료로 전기가 생산되는 방식이 계속된다면 문제는 더욱 커지게 됩니다. 줄여야 할 온실가스 배출이 훨씬 더 늘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빅테크 기업이 당초 세웠던 탄소중립 계획이 차질을 빚고 있음을 시인하며 재생에너지는 물론 원전을 무탄소 청정에너지로 포섭하는 한편 에너지 효율 향상 총력전을 펼치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AI의 또 다른 얼굴은 AI가 탄소 저감과 에너지 효율 향상 등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앞서 얘기한 하사비스는 “구글 딥 마인드가 기후문제 해결사로 등장할 것”이라 장담한 바 있는데, 실제로 지난해 '그래프 캐스트'라는 AI 기반 기상예보 모델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날씨를 미리 잘 예측하면 재난과 재해 예방에 도움이 되는 한편 재생에너지 활용도 역시 높일 수 있지요. 심지어 세계 곡물 시장의 변동도 앞서 읽을 수 있게 되겠지요. AI에 기반한 전력망과 교통망은 10% 이상의 효율 향상이 기대되고 있으며 폐기물 관리 순환경제에서도 AI의 역할이 커지고 있습니다. IEA를 비롯, 보스턴컨설팅그룹(BCG) 등 전문기관에서는 AI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활용도에 따라 탄소배출이 10% 안팎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는 AI가 기후와 에너지 양쪽 분야에서는 실보다 득이 더 클 것이라며 AI 가속 발전을 옹호하기도 했지요.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탄녹위)가 4월 과학기술정통부, 디지털 플랫폼 위원회와 함께 '탄소중립과 AI'를 주제로 합동 콘퍼런스를 연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용훈 울산과학기술원 총장은 “AI를 통해 탄소배출을 줄이는 신물질을 설계하고 합성하는 능력이 크게 향상되고 있다”며 “다양한 제조업 분야에 AI를 적용, 산업 강국의 위상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그림 참조) 세계은행이나 UNFCCC에서는 AI가 탄소배출을 줄이는 국제협력을 증진시킬 것이라 내다보기도 했습니다.
우리 탄녹위의 전략은 두 가지입니다. 'Green of AI'. 즉, AI에 필요한 에너지를 최대한 효율화·청정화하는 한편 'Green by AI' 즉, AI를 통한 녹색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겁니다.
바둑이 그랬듯, 지속가능한 세상과 AI가 잘 공존하도록 지혜를 모아야겠습니다.
김상협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공동위원장(KAIST 부총장)
〈필자〉김상협 위원장은 대통령직속 2050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김 위원장은 언론인 출신으로 매일경제와 SBS를 거쳐 세계지식포럼 창립 멤버(2000), 다보스 세계경제포럼 글로벌 어젠다 위원회 위원(2008), 글로벌녹색성장기구 이사(2010)를 역임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국정기획실 미래비전비서관과 녹색성장기획관을 지내며 '저탄소 녹색성장'의 국가비전을 수립하고 그 이행을 주도하는 등 이명박 정부 녹색성장 정책을 이끌었다. 청와대 재직 때인 2012년 10월 녹색기후기금(GCF)을 인천 송도에 유치하는 실적을 냈다. 2013년 8월부터 KAIST 경영대학 녹색성장대학원 초빙교수를 맡으며 현재는 부총장직을 역임하고 있고, 2020년 9월 제11대 제주연구원장을 거쳤다. 2014년 기후변화 싱크탱크인 '우리들의 미래' 설립을 주도해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신문협회 대상(2003), 한국방송협회 올해의 방송인상(2007), 홍조근정훈장(2013)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