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신번호 변작중계기(이하 번호 변작기)를 활용한 보이스피싱 범죄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올해 3월에는 보이스피싱 범죄 정부합동수사단이 중국·태국·남아공 등 다국적 외국인으로 구성된 역대 최대 규모의 보이스피싱 발신번호 변작중계기 운영조직을 적발하고 총 21명을 검거해 구속기소했다. 이런 가운데 금융·보험 등 고객 상담업무가 많은 기업에서도 편의를 위해 번호 변작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본지는 번호 변작기의 실태를 짚어보고 문제점과 개선방향을 제시한다.
일명 '심박스(Sim Box)'라고 불리는 번호 변작기는 최근 보이스피싱 범죄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장비다. 다수의 유심칩을 장비에 꽂아 발신번호를 바꾸는 것이 기본 기능으로 중국산이 대다수다. '070'으로 시작되는 인터넷전화나 해외에서 건 전화를 국내 휴대폰 사용자가 발신한 것처럼 '010' 번호로 바꾸는 형태로 많이 사용된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A그룹 계열사가 실시한 고객 대응 콜센터 시스템 개선 사업에 번호 변작기 사용 회사가 입찰에 나섰다. 업계 관계자는 “번호 변작기 사용 회사가 010 번호로 상담 연결 확률을 높이는 것을 강점으로 내세워 입찰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실제 전화는 유선 혹은 인터넷 전화로 걸면서 고객에게는 010 발신번호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상담 업무에서 010 번호를 사용하려면 이용하는 회선만큼의 이동통신단말기를 구매하고 단말기별로 개통해야만 한다. 하지만 비용 차원에서 유심칩만 꽂으면 되는 번호 변작기 시스템이 시중에 돌아다니고 있다.
번호 변작기 유통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하지만 이를 활용해 발신 번호를 속이거나 상대를 기만하는 행위는 법에 위반된다.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르면 발신번호를 변경할 수 있는 예외 상황은 공익 목적과 수신인에 대한 편의 제공 등 정당한 사유뿐이다. 구체적으로는 영리 목적이 아닌 공공기관의 대국민 서비스 제공 및 고유 업무 수행 등이다.
다행히 국내 기업이 고객 대응 서비스에서 번호 변작기를 활용해 보이스피싱 범죄에 활용한 사례는 아직 없다. 다만 마케팅과 정보 전달 등 영리목적을 위해 010으로 변작한 번호로 고객에게 전화를 연결하는 것은 법 위반 소지가 있다. 실제로 콜센터 운영 과정에서 010으로 번호를 바꾸고, 스팸 전화가 아닌 것처럼 전화 연결을 시도하다 처벌받은 사례도 있다.
업계는 기업이 번호 변작기 사용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있다. 기술 자체는 합법적인 용도로 사용될 수 있지만 현실은 사기, 스팸, 피싱 등 불법 목적이 많은 만큼 신뢰 확보 차원에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한때 업계에서 '번호 변작기 등록제' 등을 시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보이스피싱 범죄 대부분이 공공·금융기관을 사칭하는 만큼 이들 영역에서 번호 변작기 사용은 관계기관의 감시와 함께 사회적 경각심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문제 해결을 위해 범정부 차원에서 정부, 통신사, 기업이 다각적으로 공조하는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라며 “특히 통신사는 무분별한 번호 변작을 전화 통신의 신뢰성을 저해하는 주요 문제 중 하나로 보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기술·법적 대응 및 투자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정형 기자 jeni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