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유럽에서는 암호자산규제법(MiCA)이 27개 회원국의 합의를 얻어 유럽의회를 통과했다. 2020년 9월 최초로 의회에 제출됐으나 무려 220페이지가 넘는 149개 조문으로 구성된 법안 초안을 마련하기 위한 시간까지 고려하면 4~5년 이상을 암호자산 규제 마련에 소요한 셈이다. MiCA는 전문에서 '블록체인 등 분산원장 기술은 계속해서 새로운 사업을 만들어낼 것'이며 '이는 유럽연합 전체의 경제 성장과 고용 창출로 이어질 것이므로 암호자산 산업을 성장시키고 암호자산 관련 기회를 놓치지 않으며 회원국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규제를 만든다'고 밝혔다.
MiCA가 통과된 지 한 달 후인 2023년 7월 국내에서도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다. 유럽과 달리 22개의 조문만으로 구성된 위 법은 이용자 자산 보호와 시장 질서 확립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는 국내에서 가상자산은 아직 하나의 산업으로 보호받고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MiCA와 같은 포괄적인 업권법이 제정되려면 먼저 블록체인과 가상자산이 하나의 산업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모든 규제에는 비용이 따르고 사업자의 규제준수 비용과 감독 당국의 규제집행 비용 모두 낼 가치가 있는 산업에 대하여만 지불돼야 하기 때문이다.
가상자산은 투기 자산이기 이전에 퍼블릭 블록체인을 기능하게 하는 인센티브로서 존재한다. 올해 5월 미국 하원을 통과한 미국의 가상자산 법안인 21세기 금융혁신법(Financial Innovation and Technology for the 21st Century Act)이 블록체인의 개념을 아예 '공개 원장(public ledger)'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제는 블록체인과 가상자산이 불가분인가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 매듭지어진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블록체인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노드의 참여를 독려하는 인센티브로서 가상자산이 필요하며 이렇게 발행된 가상자산은 유통 시장을 필요로 한다. 블록체인의 가치를 인정하는 이상 가상자산의 발행 그리고 가상자산이 유통될 수 있는 시장을 산업으로서 보호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블록체인과 가상자산을 산업으로 바라보면 가상자산 공개(ICO)는 피해 갈 수 없는 주제다. 발행인은 규제의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가상자산을 활용한 사업을 시도할 수 있어야 한다. 대신 모집한 자금을 목적 외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처벌해야 한다. 사업자에게도 가상자산을 이용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여지가 필요하다. 거래수수료만이 유일한 수익원이 되는 것은 사업자에게도 이용자에게도 바람직하다고 보기 어렵다. 현행법으로도 가능한 커스터디업 영위, 또는 이해 상충 가능성이 없는 다른 사업과의 겸영을 고려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법인의 유통 시장 참여를 허용하는 것 역시 블록체인과 가상자산을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다. 블록체인은 △금융 △유통 △제조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맞춰 우리 기업들의 준비도 필요할 것이다.
2024년 5월 유럽연합 위원회(EU Commission)는 유럽의 공공 부문 자체 블록체인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별도 법인인 Europeum EDIC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블록체인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10년을 내다본 디지털 유럽의 청사진을 단계별로 실현해 나가는 것이 대단하고 경이롭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빠른 추종자(fast follower) 대한민국이 아닌가. 정보기술(IT) 강국으로서 풍부한 개발자 인재 풀을 보유하고 있고 국토 전역에 IT 인프라를 갖추고 있으며 무엇보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빠르게 받아들이는 이용자들이 있다. 지금부터 착실히 준비한다면 유럽이 꿈꾸는 블록체인 산업에서의 승자는 어쩌면 우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김효봉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hyobong.kim@bk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