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바이오헬스 분야 인공지능(AI) 기술력은 선진국 수준에 이르렀지만 상용화를 위한 제도와 산업 생태계는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도개선을 통해 의료 AI 기술 산업화를 지원하고, 기업-병원-연구기관 등이 디지털을 기반으로 새로운 생태계 모형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에 AI 기반 바이오헬스 특별법 제정 추진 등 디지털혁신에 기반한 초격차 확보 움직임도 시작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바이오헬스 분야 AI 기술력이 미국, 유럽 등과 견줘 밀리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2015년 전후로 바이오헬스 산업 전반에 AI 열풍이 거세게 불면서 스타트업 창업이 불붙었고, 약 10년이 흐른 지금 이들이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영역이 의료영상 기반 AI 질병 진단보조 솔루션이다. 뷰노, 루닛 등 1세대 의료AI 업체들은 다양한 질환에 대한 솔루션을 출시한데 이어 해외 진출까지 속도를 내고 있다. 뒤를 이어 휴런, 뉴로핏, 메디컬에이아이, 웨이센 등이 독자 의료AI 솔루션을 출시하며 국내는 물론 미국, 동남아시아 등 해외 진출을 가시화하고 있다.
의료AI 업계는 기술력은 궤도에 올랐지만 상용화가 더디다고 지적한다. 개발 결과물이 시장에 안착해 수익을 내고, 제품 고도화나 신제품 개발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가로막는 대표적인 것이 의료AI 사용 전 환자 동의와 건강보험 비급여 상한선 규제다. 현재 환자는 의료AI 솔루션을 활용해 질병 진단을 보조받기 위해선 사용 전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두 군데의 사용 동의서를 작성해야 한다. 의료진은 물론 환자도 번거롭다. 또 정부는 이 솔루션 사용에 따른 수가를 비급여로 제공하고 있는데, 상한선을 둬 가격을 통제하고 있다.
권준명 메디컬에이아이 대표는 “그동안 의료AI 사업을 가로막던 개인정보보호법 등 데이터 관련 규제는 빠르게 개선되고 있지만, 실제 의료현장에 접목하고 뿌리를 내리기 위한 산업 지원 규제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라며 “의료AI 사용에 따른 개인 동의, 비급여 상한선 규제 등은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주목받는 AI 신약개발 영역도 상당수 제약사가 독자 기술력을 확보하는 등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대웅제약, JW중외제약 등은 자체 AI 플랫폼을 개발해 신약개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유한양행, 한미약품 등은 방대한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외부 AI 전문업체와 협업해 신약개발 기간 단축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상당수 기업은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신약후보물질 발굴, 임상시험 설계, 효과 검증을 유지하는 등 기술력 격차가 심하다. 이들은 데이터 수집부터 활용 등 AI 접목을 위한 기본적인 환경마저 열악해 업계 전체 AI 역량을 끌어올리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가장 필요한 것은 성공사례다. 세계적으로도 AI를 활용한 신약개발 성공 사례가 없기에 기업들도 방향과 비전을 설정하는 게 쉽지 않다. 성공사례를 만들기 위해선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만큼 기업-병원-투자사 등이 생태계를 조성해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업해야 한다.
박준석 대웅제약 신약디스커버리센터장은 “신약개발 AI 영역은 아직 성공사례가 없는 만큼 이것만 해결되면 많은 기업이 참고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며 “기업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고 병원과 벤처투자사 등과 협업이 필수”라고 말했다.
국회에서도 산업계 목소리를 반영해 특별법 제정과 규제 개선 등 대대적인 제도 지원을 추진 중이다. AI를 활용한 산업전반의 혁신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요소로 부상한 만큼 산업을 지탱하는 뼈대(제도)부터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최수진 국민의힘 의원은 “우리는 글로벌 제약사와 비교해 인력과 자본, 경험 등 모든 면에서 열세인 반면 데이터와 네트워크 등 IT 인프라는 세계 수준”이라며 “결국 해외 제약사와 격차를 줄이기 위해선 AI 등을 활용한 혁신적인 방법을 접목하는 게 중요한데, 이러기 위해선 바이오헬스와 IT 융합을 위한 특별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AI 디지털 바이오법(가칭)처럼 새로운 융합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기존 법령을 정비해 규제를 개선하는 작업도 진행할 계획”이라며 “짧은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제약, 바이오산업을 빠르게 성장시키기 위해선 우리가 가진 무기(IT)를 활용해 전통적인 판을 바꾸는 혁신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정용철 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