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월 3일 우리나라는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방식 이동전화 서비스를 개시했다. 세계 최초로 CDMA 상용화에 성공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를 계기로 이동통신기술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나아가 이동통신산업 선도국으로 떠올랐다. 특히 삼성전자 등 국내 휴대폰 제조업체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향후 정보기술(IT)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진짜 승자는 따로 있다. 우리는 상용화 기술 개발에 가장 먼저 성공했지만, CDMA 표준특허 대부분은 미국 퀄컴(Qualcomm)이 차지하고 있어 매년 수조원의 로열티를 퀄컴에 지불해야 했다. 1985년 7명이 모여 시작했던 퀄컴은 이동통신산업 급성장과 함께 표준특허 덕분에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났고, 5G 기술이 보편화된 지금까지도 통신 분야 리더로 자리하고 있다.
표준특허란 표준기술을 사용하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사용해야만 하는 특허다. 특정 목적지에 가려고 고속도로를 이용할 때 반드시 통행료를 내야 하는 것과 유사하다. 기술 표준화의 목적 중 하나는 시장에 특정 기술을 널리 보급해 규모의 경제를 갖추기 위한 것이므로, 표준특허 보유자는 안정적인 로열티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표준특허의 가치는 일반 특허에 비해 훨씬 높게 평가되며, 2022년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발표에 따르면 실제로 표준특허의 경제적 가치는 일반특허의 12배 이상이라고 한다.
이처럼 고부가가치를 지닌 표준특허의 영향력은 정보통신기술(ICT)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 산업에 걸쳐 점차 확대되고 있다. ICT의 급격한 발달로 커넥티드카, 스마트공장, 원격의료 등과 같이 ICT와 융합한 신기술이 속속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들은 서로 다른 시스템 간에 정보를 원활하게 교환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특성인 '상호운용성'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상호운용성은 표준기술을 도입함으로써 구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커넥티드카는 차량과 차량(V2V), 차량과 인프라(V2I) 간 통신이 필수적인데 이를 위해 4G, 5G 통신을 도입하는 식이다.
실제로 자동차 업계에서는 이와 연관된 분쟁도 종종 발생한다. 2020년 8월 독일 만하임 지방법원은 자동차 제조사인 독일의 D사가 핀란드의 통신회사인 N사의 통신표준특허를 침해했다고 판결했고, 이듬해 상호 라이선스 계약 체결로 종결됐으나 산업계에 표준특허 영향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주요국에서는 기술표준화와 표준특허 확보에 역량을 집중해 왔다. 중국은 막대한 투자를 감행한 결과 현재 5G 표준특허 보유건수 1위에 오르는 등 표준특허 최강국에 올라섰으며, 국제표준화 무대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기사에 따르면, 2022년 우리나라의 대 중국 지재권 사용료 수지 적자의 주 원인이 5G 로열티였다고 한다. 미국은 이러한 중국의 공세에 맞서 지난해 5월 '핵심·신흥기술에 대한 국가 표준 전략'을 발표하는 등 그간 민간에 맡기던 기술표준화를 정부가 직접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지난해 8월 한·미·일 정상회담에서는 3국간 기술표준화 협력 강화를 의제화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지난 5월 범정부차원에서 '첨단산업 국가 표준화 전략'을 제시해 표준특허 확보와 기술표준화에 주력하고 있다.
현재 한국은 중국,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표준특허를 많이 보유한 국가다. CDMA 사례 등을 통해 표준특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표준특허 확보에 역량을 집중해서 단기간에 유례없는 빠른 성장을 이뤄낸 결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표준특허 10개 중 9개는 대기업 소유로, 표준특허 생태계가 아직은 약한 편이다. 앞으로 표준특허의 영향력이 휴대전화 제조업 중심에서 미래 모빌리티, 양자 등 다양한 산업으로 확산할 것이 예상되는 만큼 기업, 대학, 공공연 등 모든 연구개발 주체가 표준특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경쟁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
특허청은 우리 산·학·연의 표준특허 역량 강화를 위해 표준특허 선점이 필요한 미래 유망기술을 발굴해 민간과 정부의 연구개발(R&D) 기획을 지원하고 있으며, 산·학·연을 대상으로 표준특허 확보 전략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특허청의 지원을 통해 통신 분야 표준기술을 개발하는 W사는 5G 표준특허 보유건수 기준 글로벌 50위 내에 드는 강소기업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고 한다. W사는 주요 경쟁사의 관련 특허와 표준제안서 분석을 통해 표준화 아이템을 도출한 후 이에 대한 특허를 신속히 출원해 특허를 선점하고, 표준화 회의가 진행됨에 따라 발생하는 표준안 변동에 기민하게 대응, 특허 권리범위를 재설계하는 등 표준특허 확보전략을 지원받아 표준특허를 다수 확보할 수 있었다.
또 우리 기업이 표준기술을 사용할 때 과도한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도록 지원책도 강구하고 있다. 표준특허는 보유자가 자발적으로 표준화기구에 선언(신고)한 것이어서 해당 특허가 표준기술 내용을 실제 담고 있는지 여부는 면밀한 검토를 거치지 않으면 제3자가 알기 어렵다. 자칫하면 표준특허가 아닌데도 로열티를 지불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특허청은 표준특허를 사용하는 우리 기업을 대상으로 해외 기업이 로열티 지불을 요청한 특허와 관련 표준이 서로 일치하는지 여부를 검토해 대응전략을 마련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실제 글로벌 기업인 A사로부터 경고장을 받은 국내 중소기업이 지원 결과물을 토대로 신속하게 대처, A사의 후속 대응 없이 분쟁이 사실상 종결된 사례도 있었다.
특허청은 앞으로 국가 표준특허 경쟁력 강화를 위해 첨단산업 중심으로 표준특허 창출 지원을 확대할 계획이다. 정부가 발표한 '첨단산업 국가 표준화 전략'에 제시된 12대 첨단산업과 국가전략기술을 중심으로 표준특허 확보전략 지원을 확대하고, 표준화가 유망한 우수기술을 가진 혁신기업을 적극 발굴해 육성하려 한다. 이와 더불어 우리 산·학·연이 가지고 있는 표준특허를 수익화할 수 있도록 활용전략도 지원해 지식재산 무역수지 개선의 마중물이 되고자 한다.
현재 우리는 기술 패권 경쟁 시대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날로 격해지는 경쟁 속에 최근에는 표준기술이 패권 경쟁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어, 일각에서는 '표준 전쟁'이라는 표현마저 사용한다. 표준특허가 정말 중요한 시기인 만큼 우리 산·학·연도 기술표준과 표준특허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보다 적극적인 태도로 표준특허 확보에 도전하고 정부가 든든히 뒤를 받쳐준다면 우리나라에서도 '퀄컴'과 같이 표준특허로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김완기 특허청장 wankikim@korea.kr
〈필자〉김완기 특허청장은 핵심 전략산업 육성에 대한 전문성과 풍부한 정책 경험 등을 바탕으로 기술혁신·지식재산권 보호 등 특허청 주요 과업을 내실 있게 추진해 나가고 있다. 1971년생으로 대구 심인고와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했고, 서울대에서 행정학 석사, 미 조지타운대 법학 석사, 서울대에서 법학 박사를 취득했다. 행정고시로 39회로 공직에 입문한 뒤 산업부에서 소재부품장비산업정책관, 소재융합산업정책관, 통상정책국장, 무역투자실장, 대변인 등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