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듀플러스]<칼럼>나는 수학을 못 하는 아이구나

이은경 교육전문가.
이은경 교육전문가.

얼마 전, 경기도 한 지역의 초등학생 학부모 대상 강연에서의 일이다. 준비해온 이야기를 시작하려는데 앞쪽 한 엄마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무슨 일 때문인지 여쭤봐도 되겠냐고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한숨을 크게 내뱉는 것으로 내어놓기 시작한 대답에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3학년을 앞두고 마음이 급해진 요즘, 초등학교 2학년인 딸과 밤늦도록 수학 문제집을 사이에 두고 실랑이를 하는 중인데, 협조하지 않는 아이 때문에 마음이 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황이 그려졌다. 늦은 밤, 졸리고 피곤하여 생각할 힘이 바닥난 아이와, 한 번만 더 생각하면 풀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으로 '한쪽만 더'를 외치는 엄마.

교육에의 높은 관심을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겪었을 대한민국의 평범한 거실 속 풍경이다. 안타까운 마음에 되물었다. 아이가 힘든 걸 알면서도 공부량과 교재 수준을 높이는 이유가 뭐냐고. 대답은 단호했다. 아이 친구들은 모두 1학년 때부터 선행을 시작했는데, 우리 애만 뒤처진 탓에 그간의 격차를 따라잡기 위해 더욱 열심히 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수학 선행의 시기가 초 1로 당겨진 시대, 주변의 속도에 압도당한 초등 엄마의 불안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비슷한 시기인 2024년 발표된 기사에 따르면 서울 강남 3구 유치원 10곳 중 7곳 이상이 영어 특성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선행교육을 진행하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한다. 일부 유치원에선 초등학교 3학년 교육과정까지 가르치고 있단다. 전체 유치원의 49.2%가, 특히 만 5세 반은 100%가 유치원·초등학교 연계 교육을 적용 중이라고 답했다.

[에듀플러스]<칼럼>나는 수학을 못 하는 아이구나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강남구 38개 유치원의 '2024학년도 교육과정 운영계획'을 추가로 분석해보니, 10곳에서 연계 교육을 명목으로 초등 선행교육을 진행하고 있는데, 한글은 편지쓰기를, 수학은 초등 3학년 교육과정인 나눗셈과 분수를 가르치는 식이며 일부 유치원은 만 3세 아동에게 국, 영, 수는 물론 한자 프로그램까지 참여하도록 한다고 한다. 바쁘다, 바빠 요즘 유치원생.

유치원 때부터 시작된 이러한 선행 학습의 흐름은 아이의 선행 학습 시작 시기에 관한 결정을 대한민국 학부모의 주요 과업으로 만들었다. 선행 학습에 관한 여러 전문가의 다양한 의견, 논쟁, 성공 혹은 실패 사례 등은 낡은 이슈로 느껴질 정도다. 학부모는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며 알뜰하게 건져낸 여러 근거에 기반해 내 아이는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달리게 할지에 관한 고민을 시작한다. 유의미한 고민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간 겹겹이 쌓아 올린 무수한 정보, 자료, 신념이 무색할 만큼 갑작스레 시작되는 선행 학습의 결정적인 근거는 '옆집'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역의 분위기, 동네에 새로 들어선 학원, 새삼 알게 된 아이 친구의 수준과 속도는 어지간한 부모의 오랜 신념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내 아이의 공부에 관한 경험, 의지, 수준 등을 고려하여 선행 학습의 적기를 가늠하기엔 주변이 너무 숨차게 달리는 탓이다. 다들 하니까 일단 뭐라도 시작해야만 뒤처지지 않는다는 불안감으로 똘똘 뭉친 결정을 내리고서야 안도한다. 이렇게 다급히 시작된 선행 수업의 풍경은 어느 학원, 어느 레벨의 교실이나 비슷하다. 이해를 건너뛴 공식 대입을 강요하는 선생님을 멍한 눈으로 한참 응시하던 아이가 곰곰이 생각한다. 나는 수학을 못 하는 아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