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퇴직연금의 벤처투자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

필자는 10여년째 펀드와 연금을 연구하고 있다. 펀드 연구 주요 주제는 벤처투자이고, 연금 분야에선 퇴직연금이 최근 뜨거운 이슈다. 얼핏 보면 어울리지 않는 이 둘은 장기투자라는 측면에서 생각보다 합이 잘 맞는다. 하지만 퇴직연금의 벤처투자를 이야기하면 많은 이가 손사레부터 치는 것이 현실이다. 소중한 노후자산을 위험하게 투자할 수 없다는 심리적 거부감 때문이다.

이런 시작은 퇴직연금을 무조건 안전하게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예금에 넣어두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예금으로 묻어두기만 해서는 연금 자산 가치를 제대로 보존하기 어렵다. 지금 1000만원이 20년 후 500만원 가치밖에 되지 않음을 유념해야 한다. 자산을 많이 불리기는 바라지 않더라도, 실질적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 위험자산 편입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어떤 위험자산을 얼마나 담을 것이냐를 고민해야 한다. 그 답은 앞선 연금 선진국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영국 등에선 이미 퇴직연금을 벤처투자 재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위험자산 편입 필요성을 받아들이더라도, 대부분은 손실이 나지 않는 안전한 투자처를 찾는다. 애석하게도 안전한 위험자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는 채권조차 시장·신용 위험에 노출된다. 금리가 올라가면 시가로 평가하는 채권 수익률은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 회사채는 최악의 경우 원금을 모두 날릴 수도 있다.

자산운용에서 이런 위험을 줄일 유일한 방법은 분산투자다. 안전한 투자처는 없으니 안전하게 투자하는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특정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는 극도로 위험하다. 보통 벤처투자는 10개사에 투자하면 1개사 정도만 성공한다. 복권을 사는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복권을 여러 장 사면 평균적으로는 손해를 보지만, 벤처투자는 양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벤처펀드는 자금을 모아 복수 벤처기업에 투자함으로써 개별 기업의 위험을 분산한다. 따라서 벤처펀드 투자는 개별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보다 성공 확률이 매우 높다. 지난해 청산된 벤처펀드 4개 중 3개는 양호한 수익률을 기록했다. 최근 5년간 벤처펀드 수익률은 9.6%에 이른다.

그럼에도 그 중 하나는 투자에 실패한다는 사실이 퇴직연금 투자수단으로 부담스럽게 만든다. 망하지 않을 펀드를 고를 선구안이 요구된다. 대규모로 자금을 운용하는 기관이라면 모를까, 근로자 개인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전문성이다.

연금자산 운용에서 이른바 종목선택 효과는 장기적인 성공 요인이 되기 어렵다. 이런 벤처펀드 개별 위험을 분산할 재간접 투자 기구가 필요하다. 벤처기업에 직접 투자하는 펀드가 아니라, 복수 벤처펀드에 투자하는 재간접 투자집합을 말한다. 4개 중 하나가 실패하는 벤처펀드를 10개 모은다면, 실패 확률은 현저히 낮아진다.

퇴직연금의 벤처투자는 이렇게 자금 집합을 통해 위험 분산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추진해야 한다. 현행 자본시장법에서도 벤처펀드 같은 사모펀드에 재간접 투자하는 공모펀드를 설정할 수 있다. 공모펀드의 거래소 상장까지 추진하는 최근 추세를 감안하면, 공모형 재간접벤처펀드는 퇴직연금의 실적배당상품으로 제시하기에 충분한 유동성과 위험수익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 외에 다양한 형태의 재간접투자 기구에서 벤처펀드를 편입할 수 있다. 퇴직연금의 대표적인 자산배분형 펀드인 TDF와 디딤펀드 등에서도 대체자산 일환으로 벤처펀드를 편입할 수 있다. 기금형 퇴직연금제도가 도입되는 경우 퇴직연금기금은 국민연금과 유사하게 기금 포트폴리오 내에서 벤처투자 비중을 확대할 수 있다.

벤처투자가 무조건 위험하다는 주장은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편견이다.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 속성에 부합하는 적절한 투자 수단이 제공된다면, 벤처투자는 퇴직연금의 저조한 운용수익률 제고에 효과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 zeuss@kcm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