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시대 학교교육과 사교육의 문제
학교는 대량교육 체제를 통해 효율적으로 인력을 양성하고, 국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히 해방 이후 대한민국 사회에서 교육의 양적 성장을 빠른 속도로 이루는 데 기여했다. 학교는 산업화 시대에 필요한 표준화된 지식과 기술을 대량으로 전달하며, 산업사회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인력을 효과적으로 양성했고, 이는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과 사회적 발전의 토대가 됐다. 2차 산업혁명의 대량생산 시스템을 모델로 한 근대식 학교교육은 학년제와 표준화된 교육 과정을 통해 많은 학생을 효율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했다. 학교에서 제공된 국가교육과정은 국민들에게 기본적인 문해력과 수리력을 제공하며, 사회 통합과 국가 정체성 형성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학교교육의 이러한 성과에도, 근대식 학교교육이 획일성과 비개인화된 교육 방식으로 인해 현재의 사회 변화와 미래 요구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 산업화 시대의 학교 교육은 학생 개개인의 학습 수준, 속도, 필요를 반영하지 않고 평균적인 기준에 맞춰 운영된다. 이로 인해 학생들이 고유한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고, 일부 학생들이 소외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또, 상대평가와 같은 경쟁 중심의 시스템은 협업 능력을 저하시켜 사회적 역량을 기르는 데 한계를 드러낸다.
획일적인 공교육 시스템의 해법으로 제시된 맞춤형 교육을 위해 세계적으로 노력이 지속돼 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사교육에 의존하게 만드는 구조적 문제를 낳았다. 2024년에 발표된 사교육비 통계조사 결과에 따르면 총 사교육비는 27조를 넘어섰다.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사교육비의 계층간, 지역간 격차라고 할 수 있다. 월 사교육비 지출을 비교해 보면, 월 소득 300만원 이하의 가정에서는 18.3만원을 지출하는데 800만원 이상 가정에서는 67.1만원을 지출하고 있어서 3.7배의 차이가 있다. 지역간 차이를 보면 서울은 월 62.8만원을 지출하는데 읍면지역은 28.9만원을 지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교육비 1원당 교육 효과가 같다고 가정한다면 초중고 재학중 사교육비 누적액의 격차는 훨씬 더 심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교육비 통계에 유아 시기의 교육비가 반영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교육에 의한 교육격차는 더욱 심각함을 시사한다. 공교육의 역할 강화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다.
◇AI 디지털교과서를 활용한 개인별 맞춤형 교육의 구현
우리나라는 헌법과 법률에 개인별 맞춤형 교육의 국가적 책임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31조 제1항에서는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했고, 교육기본법 제3조에서는 '모든 국민은 평생에 걸쳐 학습하고, 능력과 적성에 따라 교육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맞춤형 학습의 권리를 보장해야 할 책무를 갖고 있는 것이다.
맞춤형 교육을 구현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식은 학생 개인별로 능력과 적성에 따라 학습할 수 있도록 여러명의 교사가 과목별로 지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튜터링 시스템은 어느 나라에서도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인적, 물적 자원의 한계로 모든 학습자에게 개인 튜터를 지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내외에서 이러한 튜터링을 구현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연구된 이론이 '지능형 튜터링 시스템(Intelligent Tutoring System:ITS)'이다. ITS는 학생 개개인의 학습 수준과 필요를 분석하여 최적화된 학습 경험을 제공하는 컴퓨터 시스템이다. 최근 인공지능(AI) 기술이 결합되면서 ITS는 기존의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교육 방식을 넘어, 학습자 중심의 개별화된 학습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도구로 더욱 주목받고 있다. 'AI 코스웨어'라고도 불리는 AI 기반의 ITS는 학생의 학습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 학습자의 수준, 속도, 선호도에 맞춘 맞춤형 학습 경로를 제공한다.
내년에 전국의 학교에 도입될 예정인 'AI 디지털교과서(AIDT)'는 우리나라 교육과정에 따라 설계된 AI 기반의 ITS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정책은 교사가 AIDT를 활용해 학생 개인의 성취도를 극대화하며, Bloom의 완전학습 모형을 기반으로 모든 학생이 성공적으로 학습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AIDT는 학습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개념에 대해 즉각적인 피드백을 제공하며, 필요에 따라 난이도를 조절하거나 힌트를 제시한다. 학생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지속적인 학습 동기를 부여한다. 교사는 AIDT가 제공하는 데이터를 활용해 학생들의 학습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추가적인 지도와 정서적 지원을 제공할 수 있다
◇AI 디지털교과서를 활용한 영어 수업의 변화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영어 수업의 한계는 한 명의 교사가 다수의 학생을 대상으로 실제 의사소통 능력 향상을 위한 개인별 맞춤형 학습 지원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 수업은 대부분 학생들의 다양한 학습 배경과 수준을 충분히 반영하기 어렵다. 학교 수업에서는 영어로 말하거나 글을 쓰는 실제적인 학습 기회가 제한적이다. 학생들끼리 조별 활동을 통해 회화를 연습하는 경우에도 잘못된 표현을 서로 교정하지 못해 실질적인 향상이 어려울 수 있다. 실질적인 회화와 작문 교육을 위해서는 소규모 수업이나 원어민 교사와의 상호작용이 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 공교육 내에서 이를 구현하기 위한 예산과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얼마 전에 공개된 영어과 AIDT의 기능을 살펴보면, 학생들이 영어 문장을 읽거나 녹음하면, AI 시스템이 즉시 발음을 분석하고 평가한다. 발음의 억양, 강세, 정확도를 그래프로 시각화하여 학생들이 자신의 발음을 원어민과 비교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잘못된 발음은 반복 연습을 통해 교정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학생들은 외국인과 대면하지 않고도 자신감을 가지고 영어를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특히 내성적인 학생들에게 부담 없이 영어를 연습할 환경을 제공하게 된다.
학생이 작성한 영어 문장은 AI가 즉시 문법, 단어 선택, 문장 구성 등을 분석하고 수정 사항을 제안한다. 예를 들어, 현재진행형과 같은 특정 문법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AI 챗봇이 해당 문법의 정의와 예제를 제공하며 학습을 지원한다. AI는 학생들의 작문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오류를 분석하여 추가 학습 자료나 강의를 교사와 학생에게 추천하며, 교사는 이를 통해 학생들은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줄 수 있다.
◇AI 디지털교과서를 활용한 수학 수업의 변화
수학은 세계적으로 교실에서 학생들의 격차가 가장 심하게 나타나는 교과라고 할 수 있다. 맞춤형 수학 수업을 위해서는 학생의 수준 진단에 따른 맞춤형 처방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가 AIDT를 활용하면 학생들의 학습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분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문제 풀이 시간, 정답률, 특정 개념에서의 오류 패턴 등을 기반으로 학생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게 된다. 교사는 AI가 제공하는 대시보드에서 각 학생의 학습 상태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개인별로 필요한 학습 내용을 진단하는 것이다.
AIDT는 학생들이 푼 문제에 대해 자동으로 채점하고 피드백 자료를 교사에게 제공한다. 예를 들어, 특정 학생이 분수 계산에서 어려움을 겪는다면, AI는 해당 영역에 추가 연습 문제나 동영상 강의를 추천할 수 있다. AIDT는 학생 개개인의 학습 속도와 이해도를 고려하여 맞춤형 학습 경로를 제안한다. 예를 들어, 기초가 부족한 학생에게는 쉬운 단계부터 시작해 점진적으로 난이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학습 계획을 제공하는 것이다.
◇AIDT를 활용하는 교사가 선도하는 수업 혁신
2013년에 미국에서 시도된 AltSchool 사례는 교사를 배제한 '디지털 중심 접근(Digital-Only Approach)'이 학교교육에서 실패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며, 기술 중심의 교육 혁신이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AltSchool은 학생 맞춤형 학습을 위해 디지털 플랫폼과 소프트웨어를 중심으로 한 학습 환경을 구축했다. 학생들은 개별화된 학습 경로를 제공받았으며, 대부분의 활동은 태블릿이나 컴퓨터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기술이 교사의 역할을 대체하려는 시도는 학습 효과를 저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일부 학생들은 읽기와 같은 기본적인 기술에서 뒤처졌으며, 기술적 도구가 이를 보완하지 못했다. 개인화된 학습 경험을 통해서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거나 깊이 있는 학습을 하도록 유도하지 못했고, 사회성 측면에서도 부정적인 결과들이 보고되었다.
'교사가 이끄는 교실혁명' 정책은 단순히 기술 중심의 교육 혁신이 아니라, 교사가 중심이 되어 디지털 도구를 활용해 수업을 혁신하고 학생들의 주도성과 창의성을 키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AI 기술은 학생들의 학습 데이터를 분석하여 개인화된 학습 경로를 제시할 수 있지만, 학생들의 정서적 상태나 학습 동기를 파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지도하는 역할은 여전히 교사에게 달려 있다. 교사는 AI가 제공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학생들에게 적합한 피드백을 제공하며, 학습 격차를 줄이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AI와 디지털 기술만으로는 창의적이고 협력적인 교육환경을 조성하기 어렵다. 교사는 단순한 지식 전달자가 아니라 수업 설계자이자 촉진자로서, 학생들이 깊이 있는 이해와 사고력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학생들이 단순히 지식을 암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세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줘야 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창의성, 인성, 융합 능력 등 다양한 역량이 요구된다. 이러한 역량은 단순히 암기하는 지식만으로는 길러질 수 없으며, 교사의 지도와 학생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달하게 된다. 교사가 주체가 되어 AIDT의 도움을 받아 모든 아이들이 수업에서 주인공이 되는 수업 혁신을 기대한다.
정제영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원장·이화여대 교육학과 교수
〈필자〉정제영 교수는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 원장을 맡고 있는 미래교육 전문가다. 정 원장은 서울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44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사무관과 서기관을 거치며 교육정책 기획 및 집행을 수행했다. 이화여대 교수로 부임해 교육학과장, 호크마교양대학장, 기획처장, 미래교육연구소장을 역임했다. 현재 대한민국 교육과 학술정보 시스템의 디지털 대전환을 선도하는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