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둔화)을 건너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적으로 자동차 산업의 혁신역량 강화를 위한 산·관 연구개발(R&D) 투자가 증가하고 있다. 미래 모빌리티로 전환이 기정사실이고, 중국 자동차 산업이 추격을 넘어 주도권을 확보하자 선진국 정부·기업이 바짝 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성차 제조사는 2022년부터 2024년까지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코로나19 이후 자동차 공급망이 단절되자 수요자 우위 시장에서 공급자 우위 시장으로 바뀌어 자동차 가격이 큰 폭으로 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성차와 공급업체간 수익성과 혁신성 격차는 오히려 확대됐다. 완성차들은 판매 가격을 결정할 수 있지만, 공급사는 공급 가격을 인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최근 유럽연합(EU) 집행위는 2023년 세계 2000대 R&D 투자 기업 명단을 발표했다. 2022년까지 2500대 기업을 산업별·국가별 구분해 발표했지만, 최신 발표에서는 조사 대상을 2000개로 축소했다. 지난해 EU 집행위 세계 2000대 R&D 투자 기업 분석에서 자동차와 부품 산업은 전체 투자의 14.6%를 점유해 소프트웨어(SW)와 컴퓨터 서비스·제약·기술 하드웨어에 이어 4위를 차지했다. 등재 자동차 업체수는 2022년 172개사에서 2023년에는 154개로 감소했다.
하지만 등재 기업 비중은 6.9%에서 7.7%로 증가했다. 자동차 업체는 2022년 1727억유로를 R&D에 투자한 후 2023년 7.3% 증가한 1853억유로를 투자했다. 기업 수는 감소했지만 투자 총액과 평균 투자액은 증가했다. 2023년 등재 기업 중 완성차가 50개사로 2022년과 동일했으나, 부품 업체는 104개사로 18개사가 감소했다. 완성차 업체의 투자 총액은 1321억유로로 전체 투자의 71.3%를 차지했으며, 부품업체는 561억달러를 투자했다. 2022년에 완성차 업체가 1183억유로를 투자해 68.5%를 차지했는 데 2023년에는 완성차 업체의 투자 비중이 증가했다.
우리나라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 비율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한 바 있다.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가 가속하면서 투자 금액과 혁신 생태계가 모빌리티 미래 주도권 확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23년 기존 자동차와 모빌리티 관련 투자는 300조원을 훌쩍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보통신기술(ICT) 업체와 창업 벤처기업 투자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154개 혁신 기업의 매출액 대비 R&D 투자 비율은 4.79%를 기록해 2022년(4.78%)을 약간 상회했다. 이들 기업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7.58%를 기록했다. 국가별 등재 기업 수는 중국 40개, EU 37개(독일 20개·네덜란드 5개·프랑스 4개), 미국 33개, 일본 26개, 우리나라가 7개다. 중국의 평균 집약도는 5.48%, 평균 영업이익률은 2.46%를 기록했다. 정부의 R&D 보조금과 각종 세제 혜택이 상대적으로 낮은 수익률에도 중국 자동차 기업의 집약도를 우리 기업 평균의 2배 이상으로 끌어 올렸다. 미국의 평균 집약도는 4.76%, 평균 영업이익률은 7.57%를 나타냈다.
영업이익률은 중국보다 높으나 집약도는 뒤떨어지고 있다. 미국 정부가 중국이 미래 모빌리티 산업을 선도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것도 이해할만하다. 최근 구조조정을 겪고있는 EU 자동차사의 평균 집약도는 5.73%, 평균 영업이익률은 8.48%로 미국과 중국보다 높다. 하지만 전략 실패로 인해 유럽 자동차 업체의 산업 전환이 부진하고 세계 시장에서 밀려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자동차 산업을 보유해왔던 독일의 평균 집약도도 6.19%, 평균 영업이익률은 8.19%를 기록했지만 대대적 구조조정을 단행하고 있다. 독일 기업의 혁신역량이 중국 업체 대비 우위에 있더라도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 자동차 업체와의 경쟁에서 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업체의 평균 집약도는 3.71%, 평균 영업이익률은 8.61%를 기록했다. 토요타가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일본 자동차 산업 집약도가 낮아 덩치만 커졌지 수요 변화나 경쟁자의 전략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기업의 평균 집약도는 2.15%, 평균 영업이익률은 9.42%를 기록했다.
등재 기업 수도 적고 현대차그룹이 3개사, 한국타이어를 제외한 3개사도 과거 현대차 관계사다. 비교 대상 국가 가운데 집약도가 가장 낮으나 수익률은 제일 높게 나타났다. 현대차·기아의 영업이익률이 높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우리 자동차 산업이 적은 R&D 투자로 높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면서 연구개발의 생산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모빌리티 산업 육성을 위해서는 자동차 산업 생태계 전체의 R&D 투자 증대가 필요하다. 등재 완성차사 50곳의 평균 집약도는 4.85%, 평균 영업이익률은 7.61%, 부품 업체의 평균 집약도는 4.67%, 평균 영업이익률은 7.53%를 기록했다. 두 집단 간 혁신 투자 비중과 수익률에서 별 차이가 없다. 대부분 우량 혁신 기업이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2020년 자동차와 트레일러산업(C30) 내 대기업 경상연구개발비가 3조5431억 원, 중견기업은 9212억원, 중소기업은 2739억원으로 총 4조7388억원이 투자된 것으로 분석했다. 2023년 대기업 5조7058억 원, 중견기업은 1조1236억원, 중소기업은 3418억원으로 총 7조1714억원이 투자됐다. 2020년 대비 51.3% 증가했다. 같은기간 증가율은 대기업이 61%, 중견기업이 22%, 중소기업이 24.8%를 기록했다. 총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기업이 74.8%에서 79.6%로 증가했지만, 중견 기업은 19.4%에서 15.7%로, 중소 기업은 5.8%에서 4.8%로 각각 감소했다.
기업 규모별 집약도는 2020년 대기업 2.11%, 중견기업 1.37%, 중소기업 0.58%에서 2023년 대기업이 2.18%로 증가했지만, 중견기업은 1.27%, 중소기업은 0.56%로 하락했다. 국내 자동차산업의 완성차업체 주도형 혁신 체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한국은행은 자동차용 차체와 트레일러, 자동차 부품 산업(C303)의 2023년 경상연구개발비를 3조4486억원으로 분석했다. 국내 완성차 업체의 판매 물량이 최고치를 기록했던 2015년 1조6191억 원에서 2023년까지 연평균 20.8%씩 증가했다. 같은 기간 중 연구개발 집약도는 1.01%에서 1.56%로 증가해 부품 업계 혁신에 대한 의지를 볼 수 있으나, 외국과 비교해선 매우 낮은 수준이다.
이같이 국내 자동차 산업의 연구개발 투자는 지속 증가하고 있지만 현대차그룹의 투자 점유 비중이 점증하고 여타 업체의 비중이 감소하는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국내 자동차 산업 전체 연구개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2년 66.2%에서 2023년 75.4%로 증가했다. 연구개발 투자 내용을 발표하지 않고 있는 한국지엠(지엠 한국사업장)을 제외한 KG모빌리티와 르노코리아의 연구개발 투자 합계는 2023년 전년 대비 20.7% 증가한 2867억 원으로, 현대차·기아 투자의 4.4%에 불과해 판매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자동차산업 전체 연구개발 투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증가하면서 계열과 비계열 부품사 간 투자 격차와 집약도 격차도 축소되지 않고 있다. 특히 1차 협력사 중 중장기적으로 R&D에 투자하고 있는 기업수가 2019년 이후 감소하고 있어 생태계 혁신성 저하가 우려된다. 그나마 투자 기업들의 평균 투자액이 증가세를 유지하고 있어 다행이다.
2023년에는 처음으로 계열 부품 5사의 연구개발 투자 비용이 비계열 부품사 265개사를 추월했다. 265개사는 5년 이상 연속 연구개발 투자를 실시한 기업이다. 그러나 타이어 3사를 비계열 부품사에 포함할때 투자 총액은 2조5786억원으로 계열사 투자액을 상회했다. 우리나라는 대표적 자동차 부품인 타이어를 고무 산업으로 분류한다. 타이어 3사의 2023년 연구개발 투자는 전년 대비 25% 증가한 3937억원, 집약도는 4.84%를 기록해 여타 부품사 집약도에 비해 3배 가까이 높다. 국내 타이어 업계의 글로벌 위상이 높은 이유다.
국내 자동차 부품업체수는 최대 1만4000개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0인 이상 고용 업체 수는 4700개사, 외부감사 대상 기업 수는 1480개사에 달하고 있다. 특히 외부 감사 대상 기업의 매출액이 자동차 부품 산업 전체 매출액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자동차 업체의 연구개발 투자가 증가하고 있지만 정부 예산 지원은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국내 자동차 산업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3%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의 자동차 산업에 대한 연간 R&D투자 지원은 1조원 정도에 그치고 있다. 세계 전기차 수요가 감소하고 있는 걸로 잘못 알고 있는 국내 소비자 대부분이지만 올해 세계 전기차 판매는 전년 대비 300만대 이상 증가해 1800만대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중국산과 중국 브랜드 전기차의 판매가 1400만대에 달하고 있다.
미래 모빌리티는 전기 동력 기반이기 때문에 전기차 산업을 안정적으로 육성하지 못하면 소프트웨어 정의자동차(SDV)와 자율주행차, 나아가 첨단항공모빌리티 산업 육성에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 그동안 정부의 R&D 예산 지원은 다다익선의 형태를 띠어왔다. 하지만, 최근 세계 자동차 산업 환경이 매우 불확실하고 혁신 역량을 확보하지 못한 기업의 전도가 불투명한 현실에서 뿌리기식 지원은 지양해야 한다. 혁신 역량을 보유 중인 국내 부품 업체수가 감소하고 있고, 최근 자동차 부품 업계 경영 성과가 상대적으로 부진해 투자를 시행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따라서 선택과 집중의 예산 지원을 해야 한다. 특히 투자 지원 우선 대상 기업은 1차 공급사가 돼야하고, 나머지 업체에 대한 지원은 최소 3인 이상 연구직과 공학 기술직 인력을 보유한 기업을 대상으로 엄격한 심사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예산 배분의 효율성 제고만이 성과 창출과 함께 수직 계열과 통합 구조 중심의 국내 자동차 산업에서 낙수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항구 자동차융합기술원 원장 lyg8779@hanmail.net
〈필자〉이항구 원장은 1987년부터 산업연구원에서 자동차산업 연구를 담당했다. 2020년부터 한국자동차연구원 연구위원으로 근무하면서 호서대 조교수를 겸하다가 올해 2월 제9대 자동차융합기술원 원장에 임명됐다. 친환경차 보급뿐만 아니라 기업간 협업법 제정과 상생 결제 시스템 구축에 기여했다. 기획재정부 재정사업평가위원, 국토교통부 자율주행자동차 융복합 미래포럼 위원, 중소벤처기업부 규제 특구 자문위원, 환경부 WTO 무역과 지속 가능 환경협의체(TESSD) 대응 TF 위원, 인베스트 코리아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