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에 국내 출시된 시빅 유로(Civic Euro)는 기존 시빅 세단보다 차체 길이는 25cm 짧고 가격은 비싼 차다. 세단은 2천만원대 후반인데 유로는 3,150만원에 나왔다. 엔진은 같지만 사양이 더 좋다. ‘5도어’ 해치백이니 문짝도 하나 더 많긴 하다. 해치백에 사양을 더 좋게 얹어 세단의 상위 모델로 배치한 것은 현대차 중 아반떼와 i30의 관계에 비할 수 있겠다. 차이가 있다면 시빅 유로는 이름처럼 유럽산이라 시빅 세단(기존 일본산)과는 원산지부터 다르다는 점이다.
출범 후 10년 남짓 일본산 모델들로 단출한 라인업을 유지해온 혼다코리아는 지난 연말부터 본격적으로 ‘수입선 다변화’와 함께 ‘라인업 혁신’에 나섰다. 한 번에 다섯 개의 신차 도입을 발표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단행했고, 그 결과 미국산인 파일럿, 오딧세이, 어코드, 크로스투어와 영국산인 시빅 유로가 동시다발로 이 땅을 밟게 됐다. (여기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CR-V도 올해 초 미국산으로 대체됐다.)
영국 스윈든에서 생산되는 시빅 유로, 즉 시빅 해치백은 ‘미국형’으로 볼 수 있는 기존 시빅 세단과 차별화된 ‘유럽형’ 모델이다. 이전세대부터 세단과 해치백의 플랫폼이 나뉘어 해치백은 유럽 전용 모델의 성격을 띠게 되면서 영국 공장이 생산을 전담하게 됐고, 덕분에 고성능 버전인 ‘타입R(TYPE R)’ 해치백의 경우 일본 시장에서도 역수입해다 팔았었다. 핵심 시장이 유럽인 만큼 생산뿐 아니라 개발의 일정 부분도 현지에서 이루어진 것은 물론인데, 특히 이번 9세대 모델의 개발과정에서는 일본 지진 사태로 인해 영국 혼다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후문이다.
2005년에 등장한 8세대 시빅 해치백은 지금 보아도 미래지향적이고 파격적인 실내외 디자인이 압권이었다. 대중차를 이처럼 개성 넘치고 모험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다는 것이 ‘역시 혼다!’라며 엄지손가락을 추켜들게 만들었다. 세단과 비교했을 때 우선 시각적으로 눈길을 끄는 요소가 많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연료탱크를 앞좌석 아래에 배치한 ‘센터 탱크’ 레이아웃이랄지 뒷좌석의 ‘매직폴딩’시트와 같은 기능적인 면에서의 혁신 또한 뒷받침되고 있었다. ‘그림의 떡’이고 ‘남의 떡’인 시빅 해치백은 그래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물론 당시만 해도, 아니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럽형 시빅을 이렇게 떡하니 국내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었다. 그만큼 시장이 성장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 반갑지만, 시빅 해치백에 대한 기대감은 예전만 못한 것이 사실이다. 요즘 혼다의 위상이 그렇다. 지난 해 초 유럽에서 출시된 9세대 시빅 해치백은 좋은 반응을 얻은 기존 모델의 기본 구성을 그대로 잇되 약점을 개선하는 수준의 변화를 거쳤다. 폭스바겐 골프의 5세대와 6세대 모델의 차이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선 느낌이면서도 다소 짜리몽땅하고 온순한 느낌을 주었던 외관은, 선을 길게 빼고 캐릭터라인을 살려 크고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눈에 띄긴 하지만, 호감이 가지는 않는다. 조화가 부족해 보인다. 기존 모델의 구조적 기준점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외관상으로는 세대가 바뀐 느낌을 전달하려고 한 것이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공기역학적으로는 크게 개선되어, 작은 해치백으로는 이례적인 0.27의 공기역학계수를 실현했다. 테일램프 일체형의 리어스포일러처럼 눈에 보이는 요소 외에도, 바닥 면을 커버로 덮는 등 많은 신경을 쓴 결과라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실내는 익숙한 느낌 그대로다. 스티어링 휠의 상단 림을 경계로 디지털 속도계를 위에, 아날로그 회전계를 아래에 배치한 ‘멀티플렉스 미터’를 채용했고, 대시보드 중앙 상단에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5인치 ‘i-Mid’ 화면을 배치했다. 화려한 대시보드는 운전자 중심 레이아웃으로 차와의 일체감을 강조했다. 차급의 한계에서 오는 소재의 부실함을 디자인의 완성도로 극복해내는 것이 기존 시빅을 비롯한 요즘의 혼다차이지만, 시빅 유로의 경우에는 소재까지도 한결 풍부한 느낌이라 세단의 상위 모델로 보기에 무리가 없는 정도이다. 후방카메라, 눈부심 방지거울, 전 좌석 원터치 윈도우, 차선변경 깜빡이 등 사양도 잘 갖췄다. 도어포켓에는 파란색 가로 줄 조명까지 넣었다.
굳이 흠을 찾자면, 화면은 있는데 내비게이션이 없고, 지붕은 유리인데 열 수가 없다는 점이다. 천장의 햇빛가리개는 전동 원터치로, 가운데 부분이 앞뒤로 벌어지면서 열린다. 창이 나뉘는 부분이 없는 만큼, 개방감은 뛰어나다. 사실 더 큰 흠은, 머리공간이 좁다는 것이다. A필러가 누워있어 머리를 압박하는 탓에, 시트를 낮게, 뒤로 밀게 된다. 팔걸이 덮개에 선글라스 케이스를 매단 것도 그 때문인가 싶다. 체구가 작은 여성이라면 넉넉할 순 있겠다. 부분적으로 튼튼한 느낌의 소재를 적용한 가죽 시트는 수동조절식이고, 2단계 히팅을 제공한다. 열선 버튼은 확인과 조작이 쉬운 위치에 있다.
스마트키는 도어 손잡이만 잡으면 잠금이 풀리는 방식이다. 시동을 끄면 전원 유지는 되지 않지만 사이드미러는 도어록 연동으로 접을 수 있다. 뒷좌석 도어 손잡이는 유리창 테두리에 숨겨져 있다. 3도어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는 효과적이지만, 손잡이 부분 플라스틱 재질이 저렴해 보인다. 도어는 넓은 각도로 열려 승하차나 짐 부리기가 쉽다. 시빅 유로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일 수 있는 ‘매직 폴딩 시트’가 제 기능을 하려면 필요한 부분이다.
겉보기에 평범한 시빅 유로의 뒷좌석은 방석 부분을 위로 들어 등받이에 포갤 수 있는 독특한 기능을 제공한다. 등받이를 접어서 만드는 적재공간으로는 확보할 수 없는 높이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화분이나 자전거, 혹은 커다란 애완견 등 세워서 넣어야(?) 좋은 것들과 함께일 때 요긴하다. 몰라서 한참 찾았는데, 방석을 세우기 위한 별도의 레버 같은 것은 없다. 그냥 위로 들어 올린 뒤, 바닥 쪽의 파이프를 아래로 내려주면 고정된다.
이 ‘팁 업’ 기능은 기존의 폴딩기능을 대신한 것이 아니다. 여느 차처럼 등받이를 앞으로 접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경우에도 방석부분이 등받이와 함께 움직여 바닥까지 내려가기 때문에 등판은 적재함 바닥과 평편하고 아주 낮게 연결된다. 이 정도면 ‘매직’이라는 수식어가 민망하지 않다. 연료 탱크를 앞좌석 아래 배치한 독특한 레이아웃과 소형화된 후륜 서스펜션 구조 덕분에 탄생할 수 있었던 이 뒷좌석 구조는 혼다에서 상용화한지 10년이 넘었다.
아쉬운 것은 뒷좌석도 머리 공간이 좁다는 것이다. 좌석 자체의 좌면은 불편하지 않고, 등받이 각도도 적당하지만, 머리를 헤드레스트에 기대기 전에 뒤통수가 천장에 먼저 닿는다. 발 공간도 좁아 약간은 무릎을 세우는 자세가 된다. 센터 터널은 높지 않지만 앞 콘솔과의 사이에 여유가 많지 않다. 콘솔에는 중앙 송풍구도 없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도어손잡이에서 알 수 있듯이 앞좌석 위주의 차라 그렇다고 치자. 참고로, 시빅 유로는 세단보다 휠베이스가 65mm 짧다.
뒷좌석의 마술과 비교하면 트렁크 공간은 평범하다고 할 수 있다. 적재용량은 400리터이고, 등받이를 접으면 바닥 너비는 1,600x 1,350(mm)가 된다. 트렁크 바닥판 아래에는 임시 스페어타이어와 함께 약간의 수납공간이 있는데, 해외에서는 타이어 없이 이중 적재공간으로 쓰는 사양도 있는 모양이다.
유럽 시장용 시빅에는 디젤 엔진도 탑재되지만 국내 시판 차는 세단과 같은 1.8리터 가솔린 SOHC 엔진을 탑재했다. 시빅 디젤에는 자동변속기가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지만, 설혹 있다 해도 국내 배기가스 인증이나 가격 인상으로 인한 경쟁력 약화가 문제가 된다. 게다가, 다른 일본 메이커들과 마찬가지로 디젤은 혼다의 강점이 아니었던 것도 사실이다. 최근 유럽시장에 소개된 최신 혼다 디젤엔진의 실력이 궁금하긴 하지만 말이다.
스티어링 휠은 예전보다 둥글 넙적해진 모양이지만 이러한 분위기를 망칠 정도는 아니다. 두툼하게 쥐어지는 림의 파지감 역시 스포츠 주행의 감각이다. 생긴 것 뿐 아니라 조향 반응이 경쾌하고 변속 패들 조작감이 좋아 실제보다 1.2배는 잘 나가는 기분이다. 나름 스포츠 페달도 갖췄다. 센터페시아 쪽으로 올라앉은 변속레버는 스티어링 휠 패들이 있기에 거슬리지 않는다. 무릎부분에는 패드 형상이 도드라졌다. 이전 세대의 시빅에서 변속레버 옆에 자리했던 주차 브레이크 레버는 아래로 내려앉았는데, ‘짜작’하는 작동음과 함께 특이한 조작감을 제공한다. 경사로에서는 밀림방지 기능이 작동한다.
엔진 최고출력은 6,500rpm에서 141마력이고, 최대토크는 4,300rpm에서 17.7kgm로, 시빅 세단과 다를 바 없다. 레드 존은 6,700rpm부터다. 변속레버를 M위치에 두면 일단은 자동 시프트 업이 제한되지만, 끈질기게 시도하면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음 단으로 넘어간다. 물론 M모드에서는 계기판에 현재 단수가 표시된다. D에서도 임시적으로 수동모드 작동은 가능한데, D, S모드에서는 6,500rpm에서 다음 단에 바통을 넘긴다.
63km/h에서 2단, 110km/h에서 3단, 164km/h에서 4단...즉, 2단에서 100km/h를 돌파한다. 영국 제원을 보면 0-100km/h가속에 9.1초가 걸리고 최고속도는 215km/h이다. 분명 힘이 넘치는 것은 아닌데, 꾸준한 가속이 이루어진다. 마지막 기어는 6단이 아닌 5단이다. 어쨌든 100km/h로 정속주행하면 2,000rpm을 가리킨다. 크루즈 컨트롤도 갖췄다. 복합연비는 13.2km/L로, 크루즈 1.8의 12.4km/L보다 낫고, i30 1.6GDI의 13.5km/L에 버금간다. 연비 운전 정도에 따라 계기판 배경 색상이 바뀌고 나뭇잎 버튼을 누르면 능동적으로 연료를 아끼는 에코 어시스트 기능은 여전하다.
요철을 지날 때의 반응은 대체로 단단한 편인데, 묵직한 느낌은 아니다. 오히려 노면 위를 가볍게 떠서 달리는 기분이다. 고속에서 불안하다기 보다는 저속에서 튀는 느낌에 점수를 깎고 싶어진다. 가령, 포드 포커스보다 손맛이나 경쾌함이 낫지만 진중함은 그 이상 떨어진다. 205/55R16사이즈의 타이어를 끼운 것 치고는 승차감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유럽산 해치백이면서 디젤이 없는 것은 약점일 수 있지만 혼다코리아는 이를 역으로 이용해 시빅 유로만의 매력으로 시장을 파고든다는 계획이다. 물론 연간 판매 목표대수는 300대로, 많지 않다. 상황은 다르지만 폭스바겐도 올해에는 가솔린 모델을 적극 알릴 태세라고 하니, 가솔린 해치백들의 반란에 조금은 관심을 가져볼만 하겠다.
글,사진 / 민병권기자 bkmin@rpm9.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