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수는 장관으로 부임한 지 2개월여만에 차관 경질을 단행했다. 통신장교 출신으로 20년 동안 체신부의 요직을 두루 섭렵하다 차관까지 승진하여 막강 한 파워를 자랑하던 정규석 대신 청와대 경제과학비서관 오명을 발탁했다.
새로운기술을 아는 참신한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차관 경질의 이유였다. 장관이 된 지 한 달만에 결심했어요. 나 자신이 외교관 생활을 오래 했고,6 0만 대군의 조달.보급업무를 맡은 군수차관보, 국방차관도 지냈고 청와대 비서실장도 거쳤기 때문에 행정이나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판단할수있는데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어려웠어요.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 간부들이 얘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게 전체가 아니었어요. 각자가자기분야만 가지고 얘기를 하는 거죠. 속된 말로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격으로 한정된 범위였어요. 그런 형편에서는 전문 지식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기술 문제에 대한 정책 결정을 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차관만큼은 전자공학 전공자로서 박사학위 소지자이며, 그 분야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사람을 뽑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다가올 사회가 정보화사회라 하는데, 그것을 이끌어갈 주무 부처인 체신 부가 뒷짐을 지고 있는 형편이므로 우선 체신부부터 탈바꿈시켜야 되겠다고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체신부 주변에 있는 전자공학박사 네댓명을 만나 통신사업발전을 위한 조언을 듣는 척하며 은근히 떠보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마음에 드는 사람이 오명 박사였다.
"생각하는 것이 가장 분명한 사람이 오박사였어요. 앞으로 체신부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분명히 얘기했고, 자신의 포부도 분명했어요. 또 패기도 있어 보였구요." 오명 비서관을 차관으로 내정한 최장관은 우선 김재익 수석과 상의했다. 김 수석은 두말없이 찬성하며 오히려 오비서관에게 체신부로 갈 것을 권유했다.
"정말로 전자공업을 일으키고 싶다면 체신부로 가세요. 그동안 여러차례 얘기했듯이 전자공업에서 가장 중요한 파트가 산업전자이고 산업전자 중에서통신산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통신산업을 직접 다루는 데가 체신 부 아닙니까. 따라서 통신산업을 어떻게 이끌고 나가 기술 개발을 하느냐가우리나라 전자공업을 일으키는 핵심 요소가 될 겁니다."오비서관의 차관 임명이 몹시 흐뭇했던 듯 김재익은 부인에게 "이제 우리나라 통신사업이 제대 로 될 거요. 오비서관한테 거기 가서 일 많이하고 오래 계시라고 했어 라며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국통신 발족을 7개월 앞둔 81년 5월말에 오명이 체신부차관으로 부임했다.
당시그의 나이는 41세. 남들 같으면 이사관을 바라보기도 어려운, 연부역강 한 나이에 이사관급에서 두 계단을 뛰어넘어 한 부처의 2인자인 차관으로뛰어올랐다. 물론 2급에 해당되는 청와대 비서관이라는 자리는 관료사회의 엄격한 계단을 거쳐 얻어진 것이 아닌 별정직에 불과했다. 또한 육사 교수라는 그의 경력만으로 차관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하더라도 2계단을 뛰어넘어 차관으로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혁명기에 해당하는당시의 시대상황이 빚어낸 작품이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혀 뜻밖에도 체신부차관으로 자리를 옮긴 오명이 체신부차관 으로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이냐 하는 물음에 대해 그를 발탁했던 최광수 장관 은 물론 체신부 간부 누구도 자신있는 예측을 할 수 없었다.
그러한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는 취임사를 통해 자신의 소신과 패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차관으로 임명된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장관을 성심성의껏 보필하겠다는 거짓 겸손 대신 그는 체신사업에 대한 비전을 거침없이 제시했다. 2백자 원고지 10매가 채 안되는 짤막한 취임사에서 그는 앞으로 체신부가 나아갈 방향을 몇가지로 요약했다.
"컴퓨터 온라인화 추세에 따라 급격히 늘어나는 정보량을 처리하기 위한 데이터통신망 확보문제는 눈앞의 시급한 과제가 되어 있습니다.""컴퓨터산업, 더 포괄적으로 이야기해서 정보산업의 사활은 체신부의 방침에달려 있고, 전자공업과 반도체산업 등 중요한 산업의 앞길은 체신부가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체신부는 새로운 기술의 발전을 누구보다 먼저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또 가장 우수한 사람이 모이는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기술의 연구개발이 가장 필요한 곳이 체신부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연구개발투자를 과감하게 늘리고 통신기기의 국산화에 박차를 가해야 하겠으며 연구분야와 기획분야 또는 타부처와의 인사교류 문제도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하게 느껴지는 그의 말들이 당시로서는 어떤 직원 에게는 상당히 신선하게, 어떤 직원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렸다. 따라서 약삭빠른 일부 직원들은 드디어 체신부에도 실세가 등장했으며, 체신부가 변화의 물결을 타게 되었다고 감을 잡기도 했다.
신임 오명차관에게는 공사 설립작업이 발등의 불로 떨어져 있었다. 씨를 뿌린 자가 곡식을 거두듯 공사 설립의 씨앗을 뿌렸던 그가 차관으로서 공사설립 위원장직을 맡아 설립작업을 지휘하게 되었다. 또한 데이터통신 전담회사 의 설립도 그가 뿌린 씨앗이었는데, 그동안 물을 뿌려준 사람이 없어 싹이 틀 생각도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도맡아 싹을 틔우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 두가지 역사적인 작업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체신부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보수와 타성의 깊은 늪에 빠져 있는 체신부 사람들을 흔들어 깨우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체신부 사람들은 지구의 한쪽구석에서 서서히 전개되고 있는 정보화사회라는 거대한 물결을 거의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당시 "제3의 물결"로 불리우던 이 새로운 물결은 컴퓨터와 통신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러한 정보화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체신부가 핵심 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감을 잡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흔들어 깨우는 방안으로 그는 교육을 택했다. 체신부 간부들을 회의실에 모아 놓고 연사의 강연을 듣고 질문을 주고 받는 가벼운 세미나형식의 교육이 었다. 1주일에 두번 갖는 차관 주재 간부회의중 하루는 정식회의를 하고 하루는 세미나로 대신했다. 본부의 국장.과장급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러한 세미나에서는 정보화사회가 무엇이며, 데이터통신이 무엇이며, 왜 우리는 전자 산업을 육성해야 하며, 앞으로 전개되는 정보화사회에서 체신부는 어떤 역할 을 해야 하느냐는 과제들이 토의되었다.
연사들은 주로 전기통신연구소나 한국과학원의 젊은 과학자들이었다. 오명차관이 직접 강의하기도 했다. 전국 단일요금통화권이라는 발상도 그러한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교육에서는 컴퓨터를 통한 실습이 병행되기도 했는데, 피교육생들은 컴퓨터 단말기를 두들겨 오명이 미국 뉴욕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제목이 나오는 것을 보며 신기해 하기도 했다.
틈이 나는 대로 매주 1회꼴로 가졌던 세미나가 1년 가까이 진행되는 동안 체신부 간부들 사이에는 하나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즉, "미래사회는 정보화사회다. 정보화사회에서는 컴퓨터와 통신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따라서 통신을 관장하고 있는 체신부가 정보화사회를 주도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과거에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탈락되어 후진국으로 전락 하는 뼈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탈락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후진국으로 전락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보화사회를 촉진시켜 선진국대열에 동참해야 할 막중한 사명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논리들이 체신부 간부들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정보화사회에 대한 인식이 안돼 있던 체신부 직원들에게 정보화사회는 물론 첨단과학기술에 대해 막연하나마 개념파악을 하게끔 해주는데 상당히 도움이됐어요. 또한 체신부가 이 분야에 앞장서 가야 한다는 인식을 새롭게 깨우쳐줬고 통신공사가 분리되고 난 다음 체신부가 정책부서로 발돋움하는데 크게도움이 됐죠." 당시의 통신기획과장 이인학의 이야기였다.
미래사회에 관해 형성된 공감대는 정보화사회에 대한 통신정책 수립으로 이어졌다. 원래 공사체제로의 전환을 주창했던 이유중 가장 중요한 것은 혼재 돼 있는 정책기능과 사업기능의 분리였는데, 공사 발족으로 사업기능이 떨어져 나가면서 체신부에는 전기통신에 관한 정책기능을 담당할 부서로 통신정 책국이 신설되었다.
그런데 1년 동안의 세뇌교육을 거치는 동안 정보화사회에 대비한 통신정책의 윤곽이 그림처럼 그려져 정책수립이 한결 용이해졌다. 그 결과 체신부는 정 보화사회 관련 부처인 상공부나 과학기술처보다 한발 앞서 정책안을 제시할 수 있었고, 또 체신부 직원들은 스스로 체신부가 정보화사회를 선도하는 부처라 공언하기도 했다. 그러한 현상이 되풀이되는동안 정부 부처중 최하위에 맴돌던 체신부의 위상이 완만한 상승곡선을 긋기 시작했다.
한 예로 80년대 중반에는 2000년대까지의 중장기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정부 각 부처에 유행처럼 번졌는데, 그 진원지는 체신부였다. 84년 김성진체신부 장관은 "2000년대를 향한 통신사업 중장기계획"을 수립하여 전대통령에게 보고한 일이 있는데, 전대통령이 이를 극구 칭찬하자 각 부처가 다투어 2000년 까지의 중장기계획을 수립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