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9)

71년초에 연두순시차 체신부를 방문한 박정희대통령은 신상철장관으로부터신년도 업무보고를 받고 난 다음 신장관과 마주앉아 차 한 잔을 나누며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전화교환기 문제 때문에 하도 말이 많고 업체간에 이권다툼이 심한 것 같아서 전전임 장관때부터 어느 기종을 채택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인지 철저히 검토해서 보고토록 했는데, 번번이 보고도 안하고 떠나가 버렸어요. 신장관 은 더 이상 미루지 말고 현재 쓰고있는 EMD와 스트로저 그리고 엑스바(X bar 와 ESK교환기중에서 어느 기종이 가장 기술적으로 우수하고 경제적으로 적합한지를 검토해서 장관이 책임지고 나한테 보고해서 결말을 내리도록 하시 오." 그처럼 박대통령은 전화교환기 문제로 이미 몇년 전부터 골치를 썩히고 있었다. 60년대 후반에 들어 우리나라 전화교환기 생산업체는 하나의 기업으로 성장 하고 있었다. 64년부터 독일 지멘스 제품인 EMD를 생산하기 시작한 금성사와 62년부터 스트로저를 생산한 동양정밀(OPC)이 국산화율을 높여가며 점증하는 체신부 수요에 따라 하나의 유망한 기업으로 발돋움하며, 국내 시장을 7대3 정도의 비율로 양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화교환기사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몇몇 기업이 크로스바(Cross bar)식 교환기의 국내생산을 정부에 건의하며 투자신청을 해옴에 따라 국내 외 기업간에 교환기전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크로스바는 그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보급돼 있는 교환기로서 EMD나 스트로저에 비해 성능이 우수한 편이었다. 그동안 국내기업이 그러한 크로스바를 버리고 EMD나 스트로저를 채택한 것은 차관이나 기술도입 조건 등 외부적인 여건 때문이었다.

"스트로저방식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식이었기 때문에 채택 했고, EMD는 독일에서 차관을 준다니까 채택했던 것이지 우리가 좋아서 채택 한 것은 아니었어요.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차관을 줄 의사가 없었거든요."전 체신부차관 정규석의 이야기였다.

대한전선과 삼성이 중심이 된 신규 참여 희망업체들의 투자신청은 기존의 생산업체를 보호한다는 체신부의 방침에 의해 번번이 묵살됐다. 그러자 그들은기존 교환기의 성능이나 가격을 헐뜯고 새로운 방식의 도입 타당성을 과장하는 진정이나 투서로 청와대를 쑤셨다. 한편 EMD로는 크로스바에 대항할 수없다고 판단한 지멘스는 새로운 기종으로 개발된 ESK의 도입을 권고했다. ESK는 일부 부품이 전자식인, 극히 초보적인 전자교환기로서 크로스바와 크게다를 바 없었다.

이처럼 교환기문제로 업체간의 티격태격이 심하자 거기에 굉장한 이권이 개재된 것으로 생각하고 박대통령은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던 것이다.

한편 박대통령의 지시사항인 교환기종에 대한 검토작업은 엉뚱하게도 장관 비서관 박남희에게 넘겨졌다. 박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신상철장관이 체신부 간부들을 모아놓고 전무국.공무국.기획관리실 중 어느 부서에서 맡아야 하느냐를 결정케 했으나 관련 부서 상호간에 핑퐁만 칠 뿐 아무런 결론이 나오지않자 영어 실력이 좋아 외국의 신간 문헌에 대한 이해가 빠른 박비서관에게그 작업을 맡겼던 것이다.

박비서관은 장관 비서관으로서의 임무는 그대로 수행하면서, 자신의 전문 분야나 소관 업무와는 전혀 관계없는 교환기에 관한 연구보고서 작성에 착수했다. 즉 EMD, 스트로저, 크로스바 등 3개 교환기의 특성과 가격, 그것들의 세계적인 분포 등은 물론 지멘스에서 EMD 대신으로 제시한 ESK 및 차세대 교환 기로 부상하고 있는 전자교환기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자료를 수집하여 비교 분석하는 작업을 벌였다. 또한 그들 교환기가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일본.홍 콩.대만 등지로 출장가서 확인하는 작업도 병행했다.

그 무렵 우리나라 교환기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EMD의 성능에 결정적인 하자 가 있다고 해서 국회에서 논쟁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체신부는 그 문제에 대한 규명이 시급함을 느끼고 제3자인 ITU 전문가를 초청해 객관적인 기술 진단을 받기로 했다.

서독인.일본인.캐나다인 등 3인의 ITU 전문가들이 3개월에 걸쳐 검토한 후 소위 ITU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요지는 기존의 EMD와 스트로저에는 결정적인 하자가 없으며, 앞으로 5년 내지 10년 사이에 전자교환방식으로 전환할 시점에서 새로운 방식을 채택하는 것은 불합리하므로 그동안은 기존의 교환기를 공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한편 박비서관은 71년말까지 전화교환기에 관한 장문의 연구보고서를 작성해 신상철 장관에게 제출했다. 물론 ITU보고서도 참작했다. 그 요지를 당사자로 부터 직접 들어보자.

"그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분포돼 있는 기종이 크로스바였어요. 일본은 거의 1백%, 미국은 90% 정도였죠. 성능도 크로스바가 가장 좋았구요. 그런데도 이미 크로스바 가지고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무렵 미국에서 는 반도체를 활용한 전자교환기를 개발해서 1백만회선 가량 운용하고 있었는데 앞으로 매년 1백만회선씩 보급해 나간다고 했어요. 그러한 전자교환기가 등장하면서 정보화사회란 용어가 나왔던 겁니다. 전자교환기가 등장하면서 정보화사회가 가능해진다는거죠.

따라서 우리나라도 전자교환기로 나가야 하는데 그 당시는 외국에서도 완성 품이 대량 생산되지도 않았고 수출되는 것도 없었어요. 앞으로 5년은 더 걸린다고 했죠. 그럼 그때까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대두됐는데 전화 적체문제 때문에 아우성치는 판국인데 손을 놓고 우두커니 앉아있을 수야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에는 자동화가 70%밖에 안돼 있었어요.

자석식.공전식 교환기가 30%나 됐어요. 그런데다 크로스바까지 들여오면 이 기종간의 연결이나 유지보수가 너무 복잡해진다는 문제점이 지적됐어요. 따라서 전자교환기를 들여올 때까지는 EMD와 스트로저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결론이었죠. 그 보고서를 토대로 하여 72년 연두순시때 신상철장관은 박대통령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첫째, 국산화율 90%의 스트로저와 65%의 EMD방식에는 결정적인 성능 결함이 없으며 이외의 다른 교환방식을 새로이 채택할 필요가 없다.

둘째, 크로스바 방식은 기존방식에 비해 성능상 장점은 있으나 발전의 한계 점에 도달해 있으며 전자교환방식의 실용화추세로 보아 현시점에서 새로이 채택할 필요가 없다.

셋째, ESK형 교환방식은 전자교환기로서 65년에 개발되어 이미 구미지역의 수개국과 홍콩 등지에서 채택 사용중이나 아직은 그 성능에 대하여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넷째, 기존 스트로저와 EMD교환기는 전자교환기의 본격적인 양산으로 선택범위가 넓어질 때까지 계속 증설하여 급증하는 통신수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다섯째, 선진국의 전자교환기 개발동향을 계속 주시 검토하여 76년 이후 80 년초 사이에 국내 실정에 적합하고 국산화율을 제고할 수 있는 전자교환기종 을 다시 선정한다.

이 보고로 전화교환기에 대한 박대통령의 오해는 풀렸고 교환기기종에 대한 시비도 끝났다. 그후 크로스바는 영영 이땅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당시의 외국의 전자교환기 개발 상황을 살펴보면 미국의 AT&T가 65년에 № 1교환기를 개발하여 74년 현재 4백만회선을 공급했고 일본은 70년에 실용화단 계에 들어섰고 서독은 72년말에 실용화에 성공했다. 당시의 전자교환방식은 통화로부분은 기계적 부품인 리드릴레이 등으로 구성하고 제어부분만이 전자 화된 공간분할방식(SDM)이었다. 그 무렵 미국의 벨연구소나 일본의 NTT연구 소는 통화로나 제어부분 모두를 전자화한 시분할방식(TDM)을 개발하는 중이었다. 그후 74년 5월에 체신부는 전자교환기 도입에 관한 타당성 검토를 하라는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산하의 전기통신연구소에 8인의 심의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작업을 맡겼다. 그때 선발된 위원중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체신부의 유택로과장, KIST의 안병성 방식기기연구실장, 금성통신연구소의 박윤서 소장 동양정밀의 이돈효 이사였다. 전화교환기에 대해 나름대로 일가견을 갖고 있던 그들은 외국에서 실용화되고 있는 전자교환기 기종의 성능을 비교하고 우리나라는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겠느냐는 점을 논의했는데, 서로 입장이 달라 같은 의견을 도출해내기는 어려웠으나 1주일에 1~2회 만나 토의하는 과정에서 공통분모를 도출해 그해 말에는 하나의 보고서를 낼 수 있었다.

성북전화국장으로 근무하다 전기통신연구소 기기부품과장으로 발령받아 그 작업을 맡았던 유택로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몇가지 전자교환방식에 대한 검토를 하고 전자교환기 도입 여부를 왈가왈부 했는데, 4자의 의견이 각각 달랐어요. KIST에서는 국내 개발을 해야 하니까연구소에 돈을 대달라 그러면 자기들이 개발하겠다는 것이었고, 금성통신은 아직은 우리나라에 보급할 시기가 아니다라는 것이었어요. 한편 전자교환기 도입을 준비하고 있던 동양정밀은 들여와야 된다는 입장이었고, 체신부 입장 에서 나는 아직 보급할 시기가 이르지만 기술 축적면에서 개발에 착수하는 것도 좋겠다고 했죠." 그 보고서의 요지는 80년까지 매년 단계적으로 외국의 기종을 선정하고 기술 을 도입하여 국내에서 생산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듬해 2월에 연두순시 에서 전자교환기는 국내 기술진을 총동원하고 독자적인 연구기구를 설립해 국내에서 개발하라는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그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체신부는 75년 8월에 전자교환기 도입의 타당성 검토와 기술 개발을 전담할 연구소를 설립하기 위해 한국전자교환연구소법안을 마련하여 경제장관간담회의 심의를 마치고 공화당 및 유정회와 당정협의를 거친 다음 관계 부처와의 협의에 들어갔다. 그런데 경제기획원에서 전자교환 기 도입문제는 개별적으로 검토할 것이 아니라 77년부터 시작되는 제4차 5개 년계획과 연계하여 재검토할 것을 제의함에 따라 연구소 설립계획은 좌절되었다. 그후 76년 2월27일 뜻하지도 않게 경제장관간담회에서 전자교환기의 국내 개발과 과도기에 채택할 기종의 도입 원칙이 결정됐던 것이다.

그때까지 체신부는 전자교환기에 관한 한 독자적인 계획에 따라 능동적으로 추진하지 못하고 청와대의 지시나 타부처의 의견에 따라 피동적으로 움직였다. 솔직한 얘기로, 체신부에서는 전자교환기 도입을 바라지 않았어요. 기술자 들도 바라지 않았고 업체들도 바라지 않았어요. 그처럼 체신부에서 움직이지않으니까 경제기획원에서 나서서 강요했던 겁니다.

원래 관리라는 게 보수적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기존 업체들이 엄청난 신규 투자를 해야 할 입장이었거든요. 때문에 체신부도 그렇고 국내 업체들도 그렇고 아무도 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밖으로부터 강요당했던 거죠."체신부 의 모 고위 간부의 고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