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연구소측에서는 연구소의 통합이 이루어지면서 환경의 변화가 있었다. 통합이 이루어지기 전인 통신기술연구소 시절에는 정만영 소장 밑에 김종 연안병성 경상현등 세 부소장이 있었는데 김종연 안병성 부소장은 하드웨어 분야의 전문가로서 각자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개발 실적을 쌓고 있었다. 특 히안부소장은 전자교환기 개발에 있어 남다른 실적을 쌓아놓고 있었다.
이에 비해 원자력공학 전공자로서 벨연구소에서 10여년동안 통신망계획에 관한 연구를 했던 경부소장은 하드웨어 개발에 대한 신념이 상대적으로 약했고 소프트웨어 위주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연구소의 설립 이전부터 전자교환기 도입 타당성 검토를 비롯하여 제1기종의 선정작업을 주도했고 그 후에도 체신부장관 특별보좌관으로서 전자교환기 관련 주요 정책 사항에 대해 장관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다 보니 이렇다 할 연구개발 실적을 쌓을 겨를이 없었는데, 이러한 점을 하드웨어 전문가들은 비난의 표적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싱크탱크로서의 연구소의 역할이 얼마나 컸느냐하는 점은 뒷날의 체신사업의 비약적인 발전이 웅변해 주었다.
81년 1월 통신기술연구소와 전기기기시험연구소가 통합되어 전기통신연구 소가 설립되는 과정에서 두명의 부소장이 그 자리를 잃게 되었다. 신설된 연구소는 부소장 자리를 없애는 대신 부소장급에 해당하는 선임연구부장 한 자리만 두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임 최순달 소장은 연구개발 실적이 있는 김종연 안병성 두 부소 장대신 그실적이 별로 없는데다 먼저 사의를 표명한 바 있는 경상현 부소장 을선임연구부장에 임명했다.
한편 자신의 대부였던 김기철 체신부장관에게 정만영 소장의 연임을 부탁 하러 갔다가 뜻밖에도 자신이 전자통신연구소 소장이 된 최순달은 무슨 수를쓰든 반도체기술을 도입하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서울과 창원의 전기통신연구소는 경선임연구부장에게 맡기고 소장직을 겸임하고 있는 구미 의 전자기술연구소에서 상주하다시피 했다.
그러한 처지인데다 그 역시 통신 전문가는 아니었으므로 전자교환기 개발 에대해서는 별다른 아이디어를 갖지 못했다. 실제로 소장이 된 지 얼마 안되어국가적인 개발 프로젝트를 찾는다며 과학기술처를 드나들면서도 정작 전자 교환기 개발 프로젝트를 떠올리지는 못했다.
그러다 보니 체신부에서도, 연구소에서도 전자교환기 개발 프로젝트에 대 해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따라서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격으로 연구원들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즉, 프로젝트 책임자인 안병성과 연구 원박항구가 구심점이 되어 주로 체신부를 대상으로 연구비 확보를 위한 로비 활동을 벌였다. 그런데 체신부에서도 주무 부서인 기술조정관실에서 반응이 없자 예산을 다루는 부서인 기획예산담당관실 간부들을 붙들고 하소연했던 것이다. 한편 청와대의 지시를 받은 체신부는 배호원 기획관리실장이 중심이 되어전자교환기개발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했다. 그때 검토했던 문제는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과연 우리 기술로 선진형 디지털 전자교환기를 개발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개발비를 어떻게 염출하느냐는 것이었다. 개발 가능성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기술직들이 부정적이었다. 실험실내에서 어린애 들의 장난감 같은 전자교환기는 개발할 수 있으나 상업용 디지털전자교환기의개발은 우리 기술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 전자교환기 발달의 세계적인 추세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어나가는 추세였습니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서 통신기술연구소에서는 안병성 박사가 중심이 되어 디지털교환기 개발을 시험실 모델로 해서 추진해 왔죠.
그런데 디지털교환기의 경우 이론적인 바탕이 깔리면 소자 구성에 있어서는아날로그보다 기술적으로 더 쉽다는 게 연구소측의 주장이었어요. 그리고주요 부품은 국제 오픈 마켓에서 선택해서 디자인하면 어느 정도의 디지털 교환기는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러한 연구소측의 주장에 대해 체신 부간부들은 한 마디로 "턱도 없다"는 반응이었어요. 실험실에서 어린애들 장난감 같은 교환기는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전화국에 설치할 국설용교환기는어림도 없다는 것이었죠." 기술직으로서는 몇명 안되는 디지털교환기 개발 찬성론자였던 기술조정관실 김로철 과장의 이야기였다.
한편 디지털전자교환기의 개발비는 어느 정도로 잡아야 하며 어떻게 염출 하느냐는 문제에 대한 검토는 기획예산담당관실로 떨어졌는데, 개발예산의 규모에 대해서는 기술조정관실로, 기술조정관실에서 다시 전기통신연구소로넘겨졌다. 그 당시 정부에서는 제5차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있어 교환기 개발 예산을 5개년계획에 반영시키는 문제도 동시에 검토되었다.
한편 81년 3월에 부임한 최광수 장관은 관례에 따라 2개월 후인 5월에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했는데, 그 내용에 "한국형 전자교환기"라는 명칭으로 디지털 전자교환기 개발계획을 몇줄 삽입했다. 보고서의 내용을 확정짓기에앞서 최장관은 간부회의를 소집해 전자교환기 개발문제를 거론했는데 기술직 국장들은 이구동성으로 반대했다.
"전자교환기 하나를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전문인력과 장비가 필요한데, 우리가 덤벼듭니까. 전기통신연구소 연구원 서너명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반대에 맞서 찬성 발언을 한 사람은 기획예산담당관 김영도였다. "전자교환기를 개발한다는 것은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아닙니다. 남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부품을 국제 오픈마켓에서 사다 가설계 조립하는 겁니다. 반도체까지 개발해서 전자교환기를 만들어 내려면 엄청난 인력과 장비와 예산이 소요되지만, 주요 부품을 국제 시장에서 사다쓴다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처럼 기술을 모르는 행정직이 연구소를 대변하는 발언으로 열을 올렸다.
어떻게보면, 기술직들은 기술을 잘 알기 때문에 반대했고, 행정직들은 기술 을 잘 모르기 때문에 찬성했다. 그러면서 서로 상대방에 대해 기술자들은 공명심에 날뛴다고 했고, 행정직들은 패기가 부족하다고 했다.
시분할전자교환기 개발계획이 구체화된 것은 그해 5월 오명 비서관이 체신 부차관으로 부임한 뒤였다. 시분할전자교환기의 개발을 국책과제로 선정하기 로결심한 오차관은 최순달 소장과 경상현 선임연구부장 등 전기통신연구소의간부들을 불러 그 프로젝트를 검토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실무자들로 하여금 연구소로부터 소요 예산과 기간 등에 관한 개발계획서를 받아내도록 했다.
실무자들은전기통신연구소에 개발계획서를 제출케하는 한편 전자교환기 개발에 관한 한 1인자라 할 대영전자 연구소장 안병성에게도 별개의 계획서를제출케 했다.
그동안 연구소의 인적 구성에는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통신기술연구소가전기통신연구소로 탈바꿈하고 나서 김종연 부소장은 곧바로 연구소를 떠났고 안병성 부소장에게는 시분할교환기 개발사업단장이라는 자리가 주어졌으나 그 자리는 하부조직도 없는 명목상의 자리였다. 게다가 연구소 통합을 전후하여 때묻은 연구소 간부들을 숙청한다는 소문이 나돌아 연구소 분위기가어수선했는데 그러는 동안에 안부소장은 대영전자 연구소장으로 자리를 옮겨버렸다. 그러니까, 지난 10여년 동안 열악한 연구환경에도 불구하고 시분 할전자교환기 개발에 남다른 집념을 보여 오던 안병성은 본격적인 지원의 길 이열리려는 순간에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떠나버렸던 것이다.
개발계획서는 그해 8월 안병성 박사가 먼저 제출했는데, 개발 기간 5년 동안에 소요되는 총비용으로 1백24억원을 제시했다. 이에 비해 유완영 박항구 팀이 작성한 전기통신연구소측의 요구액은 2백90억원이었다. "줄지 안줄지도모르는 상황이어서 명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뭐든 다 집어넣어서 최대한 늘려놓은 게 2백90억원이었다."는 것이 실무자들의 이야기였다. 둘 사이의 차이가 너무 크다 보니, 나중에는 서로 비난하는 입장이 되기도 했는데, 두 계 획서를 가지고 체신부에서 다듬은 결과 2백40억원이라는 수치가 나왔고, 그것을 제5차5개년계획에 삽입함으로써 정부 방침으로 확정되었던 것이다.
연구개발비 2백40억원에 대한 반응은 각각 달랐다. 체신부 실무자들의 첫 반응은 "이사람들 간뎅이가 부었군."이었다.
상상하기도 어려운 엄청난 숫자를 보고 말문이 막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