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0월 청와대 경제비서실의 김재익 수석비서관, 오명 비서관, 홍성 원연구관 등이 모인 비서관회의에서 한국통신의 설립 문제를 논의하고 있던중누군지 데이터통신 전담회사의 설립 문제를 끄집어 냈다.
"현재 데이터통신 문제는 체신부 계획국의 1개 계에서, 그것도 다른 업무 와같이 다루고 있어서 담당 부서의 존재조차도 희미한 실정입니다. 미래 정 보화사회에서는 데이터통신이 핵심적인 역할을 할 텐데, 거기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돼 있어 걱정이 큽니다. 앞으로 전기통신공사가 설립되면 데이터통신 전담부서를 하나의 국으로 키우든지, 아니면 별도의 회사로 만드는 게 어떻겠습니까? "데이터통신회사를 설립한다 해도 당장 마땅한 일거리가 있겠습니까. 수지맞는 일거리도 없는데 별도의 회사로 키우긴 어렵겠죠. 차라리 전기통신공사 내에 붙여 놨다가 어느 정도 큰 다음에 떼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전기통신공사내에 두었다가는 절대로 발전하지 못합니다. 전기통신공사가 독립한다 고 해도 전화문제도 해결하기 힘들 텐데 무슨 정신이 있어서 데이터통신을 키우겠습니까. 처음부터 독립 회사로 키우는 게 나을 겁니다""그 문제는 체신부에 검토를 시켰으니까 불원간에 좋은 안이 나올 겁니다"그 무렵 청와대 경제비서실에서는 데이터통신 문제가 자주 거론되었다. 데이터통신의 필요성 에 대해서는 이미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 구차스러운 설명이필요치 않았고, 다만 어떻게 하면 가급적 빨리 확산시키느냐는 문제를 놓고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나정작 주무 부서인 체신부는 데이터통신에 대해 외면하고 있었다.
실제로 체신부 계획국 계획4과에서는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데이터통신 업무를 다루고 있었고, 또 체신부의 일부 기술관료들은 데이터통신이 불가피한 시대의 흐름으로서 불원간 공중통신용으로 보급해야 하는데, 음성통신 위주인 당시의 전송로를 통해 데이터통신을 보급하는데는 문제가 있다고걱정하면서도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전화적체 문제가 워낙 무겁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데이터통신의 실체 를 파악하는 일이 너무 막연하기 때문이었다.
데이터통신 문제가 맨처음 공식적으로 거론된 것은 국보위 상공자원분과위 원회에서 였다. 80년 10월 국보위는 "중화학공업의 투자조정"이란 이름하에 전자교환기 생산체계의 개편을 단행한 바 있는데, 그때 데이터통신 문제가 깊이있게 논의되었다.
즉 79년 12월 체신부는 전자교환기 제2기종으로 WE의 No.1A 기종을 채택하면서 전자교환기의 생산체계를 4원화하여 한국전자통신(주)을 인수한 삼성과 동양정밀은 제1기종인 ITT의 M10CN, 그리고 금성통신과대한통신은 제2기종인 WE의 No.1A의 생산공장으로 지정한 바 있는데, 국보위가 이를 2원화하여 제1 기종은 한국전자통신이, 제2기종은 금성반도체통신이전담토록 했다. 여기에서 탈락한 두 업체중 동양정밀은 앞으로 공급될 농어촌용 전자교환기를 생산 케 하는 한편 대한통신의 실질적 소유주였던 대우에게는 데이터통신을 맡도록 종용했다.
"통신의 발전 단계로 보아 음성통신 다음은 데이터통신이다. 앞으로 갈수 록데이터통신의 비중이 커질 테니까 전자교환기에만 매달리지 말고 데이터통신을 맡아 달라" 그러나 데이터통신에 대한 이해가 극히 부족했던 당시로서는 그 제의가 선뜻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작업의 장본인인 오명이 청와대 비서관으로 옮겨 앉았으니 데이터통신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실제로 전자교환기 생산체계의 4원화를 2원화로 변경한 것은 그가 국보위에서 비서실로 옮긴후여서 전자교환기나 데이터통신 문제는 진행중인 현안문제였다. 게다가 같이 일하게 된 비서관 홍성원은 컴퓨터 전문가로서 데이터통신을 보급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한편 김재익 수석은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 시설 한때 데이터통신에 심취한 일이 있었다. 경제학도였던 그가 데이터통신에 심취했던 것은 경제 발전측면에서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 무렵 그는 부존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 의경우 서비스산업이 제격이며, 그 중에서도 금융.유통.지식산업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싱가포르가 동남아시아의 금융 중심지가 되고있듯이 서울을 동북아시아의 금융 중심지로 발전시키는 것을 꿈꾸고 있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통신의 발전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그는 전자교환기의 도입을 집념을 가지고 추진했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데이터통신의 개념이 그의 머리 속에 분명히 자리잡힌 것은아니었다. 그에게 데이터통신의 개념을 보다 분명히 심어준 사람은 경상현박사였다. "통신이 중요하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 통신이란 음성통신, 즉, 전화통신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컴퓨터가 전화 회선을 통하여 자료를 마음대로 주고 받을 수 있는 새로운 통신방식이 발달하고 있는데 그게 바로데이터통신이다 라는 경상현의 설명에 김재익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그러한 세 사람이 청와대 경제비서실에서 한 팀으로 만났으니 데이터통신 문제를 그대로 방치할리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명비서관이 그 문제를 과감하게 밀고 나갔다. 그의 첫번째 공략대상은 체신부장관 김기철이었다.
아무리청와대에서 대통령까지 양해가 되어 있다 하더라도 주무장관이 움직이지 않는한 일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김기철장관은 행정가도 아니요 기술자로 아닌, 정치가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를 움직이려면 정치적인 감각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오비서관 은 체신부로 김장관을 찾아가 데이터통신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한 다음 한마 디 덧붙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대통령께서도 이렇게 생각하고 계시고 청와대 비서실 에서도 이렇게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어차피 이 방향으로 가셔야 되는 겁니다 김장관은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 자신이 문외한이긴 하지만 전자 공학박사인 청와대 비서관이 찾아와 청와대의 방침임을 암시하자 먼저 선수 를치기로 했다.
"데이터통신이 중요하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내가 한번 추진해보지요"김장 관은 깊이 따질 겨를이 없이, 그것이 불가피한 선택이라 판단하고 데이터통신의 보급을 자신의 정책목표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체신부 간부들을 불러놓고 데이터통신 문제를 거론했다. 그러나 대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까지만해도 데이터통신의 실체를 파악하고 있는 체신부 간부들은 극히드물었다. 데이터통신에 관한 체신부의 주무부서는 계획국이었다. 그리고 계획국장 이응효는 체신부 간부중 데이터통신에 대해 비교적 이해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그때 그는 마침 캐나다에 장기출장중이어서 김장관은 그 과제를 전무 국으로 넘겼다.
구체적인 실무작업은 전무국장 김정열과 사업관리과장 이인학 팀이 맡았다. 그러나 데이터통신에 관한 한 그들 역시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문헌에 의존하거나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국내 에는 데이터통신에 관한 마땅한 해설서가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어판 서적수권을 사다놓고 밤을 새워가며 씨름했다.
전문가 역시 많지 않았다. 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전문가는 통신기술 연구소의 경상현 부소장과 이원웅 데이터통신연구실장 정도였다. 이원웅은 미국에서 귀국한지 1년밖에 안된 데이터통신 전문가였다. 따라서 두 전문가 와매일같이 만나다시피 하며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나갔다.
그때 마침 연구소에서는 "공중데이터통신망 설치의 타당성 조사"라는 이름 의연구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과제 책임자는 수석연구원 경상현이었으나실질적인 작업은 이원웅을 중심으로 한 데이터통신연구실의 연구원들이 맡았다. 이 연구보고서는 우리나라 정보통신의 현황과 문제점을 분석한 다음 당면과제와 발전방향을 제시했는데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교환망의 형식을 패 킷교환망으로 상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사업의 시작연도를 1983년으로 가정하고 1991년까지의 소요비용과 예상수익을 추정함으로써 사업의 타당성 을 짚어 보았다. 또한 공중데이터통신망의 운영주체 문제도 언급했는데 공공통신기관의 참여를 배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처럼 데이터통신용 교환기는 물론 전담회사의 설립방안까지 포함한 폭넓은연구보고서가 작성되고 있어 체신부 실무진의 정책안 입안은 비교적 짧은기간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80년 12월 김정열 전무국장팀은 연구소가 작성 중인 연구보고서를 참고로 하여 "데이터통신사업 육성정책"이라는 짤막한 정 책안을 만들어 냈는데 이 안은 체신부장관과 국무총리의 승인을 받아 12월19 일대통령의 재가를 얻음으로써 정부의 방침으로 확정되었다.
"산업정보시대에 돌입하는 마당에 전신전화만 가지고 안되는 만큼 데이터 통신도 해야겠다고 했더니 체신부 간부들 가운데 데이터통신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당시의 전무국 간부들이 자료를 일본에서 구해온다 뭐다 해서 애를 많이 썼습니다. 장관인 나는 매이 독촉을 했지요. 그렇게부지런히 작업을 시켜서 대통령께 보고를 드렸더니 흔쾌히 응낙을 하셨습니다. 그때 체신부에서도 그랬고 청와대에서도 시기상조론이 나왔어요. 그래 서지금이 시기상조라면 10년 후에도 시기상조가 될 거라며, 안되면 사표를 내겠다고 공언을 하고 추진했습니다. 그때 오명비서관이 청와대에서 관심을가지고 자주 진행 상황을 물으며 협조를 많이 해줬지요"김기철 장관의 회고였다. 이 정책안에서 제시된, 신설된 회사의 경영 형태는 5가지였다. 국영과 민영중 민영을 전제로 하되, 민영화하는 방안으로 1) 신설될 전신전화공사내에 데이터사업부를 설치하는 방안 2) 독립된 데이터통신공사를 설립하는 방안 3) 정부와 산업은행, 민간 3자가 참여하는 독립된 민간회사를 설립하는 방안 4)순수한 민간회사로 하되 단일회사를 설립하는 방안 5)순수한 민간회사로 하되 복수 회사를 설립하는 방안 등 5가지를 제시했다.
그중 체신부가 건의한 방안은 제3안이었다. 데이터통신산업은 그 사업의 성격상 공익성이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는 동시에 정보산업의 선도적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하자면 기업성도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부.산업은행.민 간기업 3자가 적정한 비율로 공동출자를 하는, 특별법에 의한 특수법인을 설립하여 이 사업을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첨부했다.
그런데 결재 과정에서 남덕우총리가 이의를 제기했다. 데이터통신 전담회 사야말로 순수한 민간회사로 만들어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는 제4안 의말미에 "본안 채택을 건의함"이라 덧붙인 다음 사인을 했고, 다시 전대통령이 남총리의 의견을 따름으로써 제4안이 채택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