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2월 전두환대통령은 4MD램의 개발 공로자들을 청와대로 불러놓고만찬을 베풀며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 자리에는 4MD램 개발작업을 주관 한전자통신연구소와 삼성 금성 현대 등 개발3사의 연구원은 물론 3사의 회장 그리고 상공부 체신부 과기처 등 3개 부처의 장관도 참석했다. 4MD램의 개발은 공동개발로 추진된 사업이었지만 행사 직전까지는 삼성만이 개발에 성공했던 것인데 공동개발이라 보고했기 때문에 나머지 2개사 대표도 초청되었던것이다. 대통령의 임기만료를 10여일 앞둔 전대통령은 임기가 끝나기 전에 4MD램을 개발한 것이 몹시도 흐뭇한 듯 실내를 돌며 와인잔을 권하다 스스로 취해 이런 것을 개발하는 사람은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녀야 하는거요"라고 일동을 비행기 태운 다음 "16MD램까지는 정부가 계속 돈을 대서 기업체와 공동 으로 개발하겠지만 16MD램이 끝나고 64MD램을 개발할 때는 4MD램을 성공한 것으로 돈을 벌테니까 거기서 번 돈으로 재투자하면 될 것이오. 따라서 그때부터는 정부가 더이상 돈을 대지 않아도 저절로 굴러갈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강력한 어조로 64MD램의 첫번째 개발을 주문했다.
"64MD램만큼은 여러분들이 세계에서 제일 먼저 개발해 내시오! 그때는 내 가대통령이 아니겠지만 내가 돈이 없으면 머리카락이라도 잘라서 팔아가지고 술을 사겠소" 그러자 참석자들이 대머리인 전대통령을 쳐다보며 킥킥 웃었다.
"당신네들이 내 머리카락이 없다고 해서 웃는 모양인데, 내 머리카락은 숫자가 적기 때문에 더 비싼 거요" 만찬장에는 또다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렇다면 1MD램까지 삼성이 단독으로 밀고 나가던 메모리반도체분야의 개발을 왜 4MD램부터는 관.산.연의 공동 개발로 전환했을까?공동 개발의 필요 성을 맨처음 제기한 사람은 청와대 경제비서실 홍성원 비서관이었다. 그는선발국가인 일본.미국과의 기술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전략으로 공동 개발을 생각했다. 우리나라보다 두세단계 앞서 있는 선진국을 따라잡으려면 중간 단계에서 가로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무렵 선진국과의 개발 시점의 차이를 보면 64KD램은 4년, 256KD램은 3년, 1MD램은 2년이었다. 따라서 1MD램의 개발에 착수하면서 동시에 4MD램의 개발을 추진하면 선진국과 거의 동시에 개발할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다.
그는 공동개발 문제를 주무 부처인 과학기술처로하여금 검토케 했다. 과기처전기전자연구조정관 김재균이 그 문제를 검토했다. 그 무렵 삼성에서는 25 6KD램을 개발하고 있어 다음의 개발 목표는 당연히 1MD램이었다. 따라서 그는삼성 금성 등 2개 반도체 생산업체와 전자기술연구소가 1MD램을 공동개발 하기로 하고 그들 3자와 여러 차례 협의했다.
"삼성은 256KD램을 개발하고 나면 1MD램을 개발해야 할 텐데 상당히 힘에부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삼성이 공동 개발의 필요성을 설명했으나 금성은 그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두 회사 사이에기술 격차가 그만틈 컸던 거죠" 김재균연구조정관은 그렇게 기억했다.
이듬해인 85년 6월 전자통신연구소 책임연구원 강민호가 과학기술처 전기 전자연구조정관 자리를 이어 받았다. 그때는 이미 삼성이 256KD램의 개발을 발표했고, 1MD램의 개발을 추진하고 있어 1MD램을 공동개발 목표로 삼을 수없었다. 개발 목표는 자연스럽게 4MD램으로 정해졌다. 그런데 메모리반도체 의공동 개발에 대해 경제부처의 반대 목소리가 예상보다 높았다.
"메모리반도체의 공동개발안을 내놓으니까 반대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개발해야 된다는 주장보다는 그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프로젝트라는 주장 이더 거셌습니다. 주로 경제기획원 쪽에서 반대했어요. 상공부도 반대하는 입장이었는데, 사실은 상공부가 주도해야 할 프로젝트인데 그렇게 안되나 보니까 반대하는 것처럼 보였던 거죠. 그 프로젝트에는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 는데, 상공부에는 그럴만한 자금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하면 체신부의 R&D자금을 끌어들이느냐 하는 게 문제였어요. 큰 도구로는 전자통신 연구소를 연구개발기관으로 해서 체신부 돈을 끌어내는 것으로 할 수 밖에없었죠 강민호연구조정관의 주장이었다.
그때 체신부와 과학기술처 사이는 비교적 가까웠다. 김성진 과기처장관은체신부장관에서 과기처로 옮겼기 때문에 체신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청와대와 두 부처의 관계도 좋았다. 게다가 체신부의 오명 차관과 청와대의 홍성원 비서관이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어 반도체 개발 프로젝트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 없었다. 또 전자기술연구소와 전기통신연구소가 합쳐 탄생한 전자통신연구소는 과기처 산하의 연구소였지만 연구개발자금의 대부 분이 체신부서 나왔기 때문에 두 부처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체신부 과기처 상공부 등 3개 부처가 공동으로 추진하되, 체신 부가 상당한 자금을 대고 전자통신연구소를 연구개발 주체로 하여 삼성 금성 현대 등 반도체 3사를 참여시켜 공동 개발을 한다는 계획에 대해 청와대와 두 부처 사이에 쉽게 합의가 이루어졌다.
체신부가 앞장서 반도체의 공동 개발에 참여하려 한 것은 TDX개발의 성공 에서 얻은 자신감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재벌들이 서로 힘을 합쳐 공동개발에 나선 예가 한번도 없었는데그게 처음으로 성공한 것이 TDX 개발사업이었어요. TDX 개발사업에서 재벌 들이 국가와 같이 서로 힘을 모아 성공한 예가 있기 대문에 체신부가 힘을얻어 앞장서서 반도체도 공동개발을 하자고 했던 겁니다"오명 차관의 주장이 었다. 그리하여 총 4백억원으로 추정되는 연구개발비 중 3백억원은 체신부가 부담하고 나머지 1백억원은 과기처가 부담하는 것으로 두 부처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체신부가 반도체 개발사업에 참여하는 명분은 반도체가 제대로 개발되어야 TDX도 제대로 개발된다는 것이었다.
그러자 상공부가 "전자산업 육성은 상공부 소관사항인데 왜 산업육성과 관계도 없는 체신부가 반도체 개발에 나서느냐. 반도체 개발은 앞으로 상공부 가주도해 나가겠다"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상공부는 산하의 반도체 생산업체들로 반도체연구조합을 결성하여 그 연구조합으로 하여금 개발 사업을 주도해 나가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반도체 공동개발을 둘러싸고 과기 처와 상공부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시작됐다.
반도체의 공동개발에 대한 의견은 부처마다 다르고, 또 같은 부처내에서도 사람에 따라 달랐다. 과학기술처와 체신부가 적극적인 공동개발론을 펼친데 비해 경제기획원은 개발의 어려움과 막대한 투자비를 들어 반대했고, 상공부 는 과기처에 주도권을 빼앗길까봐 체신부의 참여를 견제했다. 체신부내에서 도 정치가 출신인 이자헌 장관은 적극적인 찬성론자였음에 비해 실무 책임자 인 윤동윤 통신정책 국장은 "왜 체신부가 기억소자 반도체 개발에 참여해야 하느냐?"며 통신용 반도체의 개발에는 찬성하지만 메모리반도체의 개발에는 찬성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이장관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이처럼 반도체의 공동개발을 둘러싸고 부처간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을 때 이번에는 삼성의 강진구 사장이 공동개발의 필요성을 외치고 다녔다. 그는정부의 재정지원을 이끌어내는 방안으로 공동개발을 생각했다. 그 무렵 일본 은정부가 중점적으로 육성해야 할 사업분야를 선정, 특별법을 제정하여 재정 적지원을 해주는 한편, 국영연구소를 중심으로 관.민 협동의 기술개발을 하고있었는데 거기에서 힌트를 얻어 공동개발을 제안했던 것이다. 특히 1970 년대초부터 메모리반도체의 개발을 주도해 일본을 반도체 강국으로 이끌었던NTT연구소를 좋은 모델로 내세웠다.
강사장은 경제기획원 상공부 재무부 등 경제부처 관료들을 찾아다니며 반 동체 공동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들은 공동개발의 필요성에 대해서는공감하면서도 엄청나게 소요되는 연구개발자금을 마련하는 일이 쉽지 않으며 설사 그러한 예산이 마련된다 해도 재벌기업에 특혜를 줄수 없다는 이유 를들어 난색을 보였다. 그러자 강사장은 한국통신의 막대한 연구개발자금을 쥐고 있는 이자헌 체신부장관을 찾아가 공동개발을 제안했다. 정치가 출신인 이장관은 강사장의 의견에 선뜻 동의하며 전대통령에게 보고한 다음 전대통령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자 적극적인 개발론자가 되었다.
아무튼 4MD램의 공동개발을 둘러싼 부처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자 경제기획 원이 거중조정에 나섰다. 그때는 경제부처 간부들도 전대통령의 강력한 개발 의지를 전달받은 뒤여서 공동개발 자체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체신부의 참여여부와 함께 또 하나의 쟁점이 된 것은 공동개발의 주체를 누구로 하느냐는 것이었다. 과기처는 전자통신연구소를, 상공부는 반도체연 구조합을 개발주체로 내세웠다. 그것 역시 두 부처간의 주도권다툼의 결과였다. 그런데 정부가 반도체의 공동개발 프로젝트를 앞두고 반도체연구조합을 결성하기로 한 것은 연구개발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반도체산업은 리스크가 많은 산업이기때문에 정부가 R&D자금을 지원해 주고싶어도 지원해 줄 방법이 없었어요. R&D자금이라면 중소기업을 지원해 주는것이 원칙이지 대기업에 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나 대기업이라 해도 연구조합을 결성해서 공동으로 개발한다면 지원해 줄 수 있겠다 해서 R&D자금 을지원해 줄 수 있는 창구로 반도체연구조합을 만들었던 겁니다 반도체연구조합 최종필 사무국장의 말이었다.
연구소냐 연구조합이냐 하는 문제로 줄다리기를 하다 보니 6개월이란 세월 이흘러 버렸다. 그러자 진행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오명 체신부차관이 금진호 상공부장관을 찾아갔다.
"4MD램 같은 반도체를 개발하려면 엄청나게 값비싼 장비를 구입하고 시설 투자를 해야 하는데 조합에서 어떻게 그런 투자를 하겠습니까. 또 기술이 어느한 군데에 축적돼야 하는데, 조합이란 입만 가지고 사람을 모으는덴데 거기서 어떻게 기술축적이 되겠습니까. 이러한 연구개발사업은 연구소가 중심 이되지 않고서는 안되는 법입니다. 또한 각 분야별 전문가들이 모이지 않으면안될 일이죠. 연구소도 전자통신연구소처럼 각 분야별로 전문가들이 모여있는 연구소에서 해야 할 일이지 생산업체들만이 모여 있는 조합에서 할 일이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상공부가 간신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공동개발방법을 놓고 부처간의 이견이 계속되는 86년 4월 전학제 과 기처장관은 "반도체 공동연구개발 추진계획"을 수립, 전대통령에게 보고하여 개발원칙에 대해 전대통령의 내락을 받았다. 그후 관련부처간의 이견이 조정 됨에 따라 그해 8월 경제기획원 상공부 체신부 과기처 등 4개부처가 공동 명의로 작성한 "초고집적 반도체기술 공동개발안"에 대해 전대통령의 재가를 얻음으로써 4MD램의 공동 개발이 정부의 방침으로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