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36)

1983년초에 오명 체신부차관이 박남희 전파관리국장을 불러 뜻밖의 지시를 내렸다. "지난번 통신망 통합을 논의할 때 방송망 통합에 대해서도 얘기가 나왔는데방송망 통합은 두 방송사간에 자율적으로 통합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1년 이다 지났는데도 방송사쪽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군요. 이 문제는 대통령 께서 지시하신 사항인데 우리가 가만히 보고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전파관리국이 중심이 돼서 방송송신소와 중계소를 통합하는 방안을 검토해 보세요.

방송국의방송기능과 송신기능을 분리시켜 송신전담회사를 만들되 그 기능만 큼은 체신부 산하의 회사에서 담당하는 방안으로 연구해 보세요.""방송국에 서 순순히 응하겠습니까?" "그점에 대해서는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방송국 사장들하고는 얘기가 돼있으니까 실무자들과 잘 협의해서 추진하세요." 그 무렵 박남희 국장은 이미 떨어져 있는 지시사항만으로도 머리가 쪼개질지경이었다. 우선 극히 제한적으로 공급하던 차량전화를 새로운 방식에 의해 대량 공급을 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케이블TV제도의 도입을 위한 정지작업으로 1961년에 제정된 유선방송수신관리법을 개정하는 것도 또 하나의 과제였다. 우리나라로서는 국가적인 사업인 통신.방송위성사업을 검토하는 것은 골 치아픈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파세를 신설하는 문제도 검토되고 있었다.

그 무렵 체신부는 전파이용 개방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타의에 의해 막혀있던 전파 관련정책이나 제도가 봇물처럼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골치 아픈 일은 통신.방송위성을 띄우는 일이었다. 5년 후로 다가올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반드시 필요한 사업이었으나 당시의 국력 으로써는 너무 벅찬 과제였던 것이다. 때문에 전임자인 기술직 출신의 이영 한국장은 들볶여 못살겠다며 한직인 전파연구소장으로 떠나 버리고, 그 후임으로 행정직인 박남희가 그 해 1월초에 부임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런 데방송국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망 통합이라는 또 하나의 무거운 과제가 떨어졌으니 아무리 유능한 행정가라 해도 골치가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1982년초에 통신망 통합 원칙을 결정했을 때, 방송망 통합은 1982년말까지KBS의 주도로 KBS와 MBC 양 방송사의 송신시설을 통합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을뿐 구체적인 세부계획은 수립치 않았다. 그런데 그 무렵 두 방송사는 양사 의 방송망 통합보다는 자체의 방송망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1980년 12월 1일 신군부의 혁명정부는 한국방송협회의 결의라는 형식을 빌 려방송사통폐합작업을 단행했는데, 그 결과 동아방송(DBS)과 동양방송(TBC) 등5개의 민간방송과 기독교방송의 일부기능이 KBS에 흡수되었다. 이에 따라KBS는 기존의 채널 외에 인수한 방송사의 채널을 그대로 살려 TV 2개 채널, 라디오 4개 채널, FM음악방송 2개 채널 등 8개 채널을 갖고 종합방송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밖에도 사회교육방송과 해외방송도 실시했다. 게다가 같은날인 12월 1일부터 KBS는 컬러TV 시험방송을 실시했는데, 이듬해 1월 1일부 터 정규방송에 돌입함으로써 본격적인 컬러 TV시대를 열였던 것이다.

이에 앞서 KBS는 1976년부터 난시청 해소를 위한 시설 확장을 3개년계획으 로2차에 걸쳐 추진하던 중 방송사 통폐합과 컬러 TV방송의 실시를 계기로 19 81년부터 방송망확장종합계획을 수립하고 전국적인 방송망 확장사업에 나섰다. 한편 MBC도 가시청권을 넓히기 위한 방송망확장 5개년계획을 수립했는데주로 지방 방송망의 확장에 주력했다.

이처럼 두 방송사가 방송망 확장에만 열을 올렸기 때문에 양사간의 방송망 통합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기존의 방송망 시설의 통합에는 손을 대지 못했으나 신설한 시설의 통합은 KBS시설을 중심으로 어느정도 통합작업이 이루어져 나갔다.

한편 오명차관은 방송망 통합작업에 관한 지시를 내리기에 앞서 그것의 필요성에 대해 각계의 의견을 들어보았다. 그런데 특히 방송계 원로들로부터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사명감을 갖고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듣고 소신껏 밀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자신이 앞장서 외치는 것보다는 방송사로 하여금 앞장서도록 하는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고, 우선 방송사간부들을 설득하는 작업에 나섰다.

그첫번째 대상이 KBS사장 이원홍이었다.

그가 이사장을 만나 방송사별로 송신소.중계소를 운영하는데 따르는 시설.

인력.예산상의낭비와 자연경관의 훼손 등을 설명한 다음 "KBS와 MBC의 경우 만생각해서는 안된다. 앞으로 제3, 제4의 방송국이 생겨날텐데 그럴 경우 중계소가 난립할 것은 뻔한 일 아니냐. 당연히 한 곳으로 통합해서 공동 운영 을해야 한다"고 설득하자 이사장은 "대단히 좋은 아이디어"라며 솔깃한 반응 을보였다. 그때 마침 이사장은 연임을 바라던 때여서 뭔가 고위층으로부터 점수를 딸 수 있는 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참인데 그들 두 사람 사이에 청와대 민정비서실 비서관 최재호가 끼어들어 다리 역할을 했다. 오차관의 경기고 동기이며 신문기자 출신으로 이사장과도 가깝게 지내고있던 최비서관이 그들 두 사람 사이를 연결시키며 그들이 같은 생각을 갖도록분위기를 조성했다.

아무튼 이원홍은 "KBS 사장이 해야 할 일이 많은데 고지 점검을 하느라고 불필요한 시간을 보내서야 되겠느냐. 통신 문제는 전문기관에 맡기고 방송 자체에 전념해야 KBS가 발전한다"고 주장하며 방송망 통합에 적극성을 보였다. 이에 비해 MBC 사장 이웅희는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방송망 통합 을국가 정책으로 추진한다면 반대는 못하겠지만,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 다"며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KBS와 MBC사장이 찬성한다고 해서 방송망 통합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두 기관의 감독 관청은 문공부였고, 당시의 문공부장관은 이진희였다.

권력의핵심부와 밀착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이장관은 방송망을 통합하여 체신부 산하로 넘기는 일에 원론적으로 반대했다. 한 마디로, 문공부 산하의 기관을 떼어내 체신부 산하로 넘기는 것은 찬성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고집을 꺾기에는 체신부나 방송사 간부의 끗발이 너무 약했다. 그래서 그대안으로 생각해낸 것이 송신공사의 설립이었다. 즉, 방송의 2대 기능인 프로그램의 제작.편성과 송출 기능을 분리하여 방송국은 프로그램의 제작.편 성과 연주소의 운영을 담당하고 송신공사를 별도로 설립하여 전국의 송신소 를통합관리 하는 한편 난시청해소사업을 담당케 한다는 것이었다.

송신공사 설립안에 대해 이장관은 찬성했다. 다만 그 회사를 문공부 산하 에둔다는 조건을 달았다.

83년 8월 최순달 체신부장관은 "방송국 운영체제의 개선"이라는 제목으로 방송 송신.중계소의 통합운영 방안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고의요지는 방송국의 방송 기능과 송신 기능을 분리하여 송신 전담기구를 설립한 다음, 그 기구로 하여금 전국의 송신소와 중계소를 통합 관리케 한다는 것이었는데 전담기구의 구체적인 모습으로는 송신공사의 신설(제1안)과 한국전 기통신공사로의 통합 운영(제2안) 등 두가지 안을 제시했다. 이때 최장관은 문공부와 합의한 대로 두가지 안 중 제1안을 건의했다.

"새로운 기구의 신설은 비경제적이므로 곤란하고, 방송의 전국중계망은 통신시설이며 방송 송신소.중계소는 마이크로웨이브 통신시설과 같은 고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통신공사가 통합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하시오. 전대통령의 이와 같은 판결에 따라 송신공사의 신설안은 무산되었다. 전대통령이 참모들의 건의를 묵살하고 다른 지시를 내린 것은 흔치 않은 일인데, 그것은통신망이나 방송망 통합에 관한 그의 소신이 그만큼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전대통령의 검토 지시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방송망 통합작업은 쉽사리 진행되지 않았다. 우선 주무 부처의 하나인 문공부가 뜻대로 되지 않자 이 작업에 냉담했다. 또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낸 부처는 체신부였으나 통합작업 을 이끌어갈 기관은 KBS.MBC 두 방송사와 한국통신이었다. 방송사측에서는 조직의 일부를 떼어내는 일을 달갑잖게 생각했으며, 특히 통합 대상이 되는사원들은 전통적으로 관료적인 조직인 한국통신 산하로 흡수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는 한국통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감독기관인 체신 부가 지시하기 때문에 마지못해 움직였을 뿐 내심으로는 통합계획 자체를 달갑잖게 생각했다. 우선 통합의 실익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방송 송신소와 중계소를 인수할 경우 그것의 현대화에 막대한 투자비가 소요될 뿐 수수료 수입은 실비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게다가 관료주의에 젖어온 한국통신 사원들은 자유분방함을 특권으로 알고 있는 방송사 사원들에 대해 생리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에 통합작업의 주체인 한국통신부터 복지부동이었다. 국가정책상 불가 피하다고 인정한 이우재사장은 어느 정도 반응을 보이는듯 했으나 당장 부사 장선으로 내려가면 "왜 이렇게 쓸데없는 일을 하느냐"며 움직일줄 몰랐다.

그렇다고체신부에서 이사장에게 마음대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이사장은 오차관의 육사 대선배이고 또 전대통령과 가까운 사이라는것을 알기 때문에 다들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오차관은 주무국장 인박남희를 족쳤고, 박국장은 다시 한국통신의 상대역인 계획국장 이희두에게통사정을 했다. 그러나 이국장 역시 호응해 주지 않는한 용뺄 재간이 없었다. 이처럼 관련된 당사자들이 손끝을 맺고 있자 청와대 비서실에서 그 문제를 챙겼다. 오명차관과 함께 식장산중계소를 답사하여 방송망통합의 필요성을 절감한 강경식비서실장이 그해 12월 체신부.문공부 차관과 한국통신.KBS.MBC 사장 등 관계관 회의를 소집했는데,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통합운영의 원칙에 합의한 뒤 통합의 범위와 방법에 대하여 계속 검토해 나가기로 했다.

이듬해 2월에는 "방송 송신.중계소 위탁운영"에 관한 또 다른 지시가 청와대에서 떨어졌다. 즉, 방송기능과 송신기능의 분리 및 송신.중계소의 통합은 앞으로 언론기본법을 개정할 때 일괄 조치하도록 하고, 현행법으로 시행이 가능한 위탁운영방안을 과도적으로 채택하되, 한국통신이 각 방송사로부터 송신.중계소의 시설 및 인원을 위탁받아 운영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관련부처인 체신부와 문공부는 조속한 시일안에 추진계획을 수립하여 보고하라고지시했다. 이때부터 한국통신에 의한 "통합운영"이 아닌 "위탁운영"방안이 검토되었던 것이다.

이 지시에 따라 체신부는 부랴부랴 위탁운영안을 마련하여 그해 6월에 문공부와 공동명의로 전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전대통령은 그 자리에 체신부장 관김성진과 문공부장관 이진희외에 한국통신 사장 이우재와 KBS사장 이원홍, MBC사장 이웅희를 배석시켰는데, 체신부 전파관리국장 박남희의 보고를 듣고나서 참석자 전원에게 각자의 의견을 묻더니 별다른 이견이 없자 관계부처와 각사는 긴밀한 협조하에 효과적으로 추진하라"며 그 계획안에 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