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37)

통합운영이 아닌 위탁운영이 시작되면서 인위적으로 추진된 작업의 문제점 이드러나기 시작했다. 우선 시설투자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위탁운영에관한 협정서"는 "통신공사는 위탁시설의 개선.통합.재배치 등 투자사업이 필요한 경우 해당 방송사와 합의하여 시행할 수 있다. 이 경우 비용은 해당방송사가 각각 부담한다"고 규정했는데, 바로 이 조항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한국통신은 방송사의 자산에 임의로 투자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방송사는 언젠가는 시설을 완전히 이관하는 통합운영체제가 될 것을 예상하여 투자를 기피했다. 따라서 송신소.중계소의 시설이 개선되기는커녕 오히려 노후화되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문서상의 통합이 이루어졌을 뿐 실질적인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데 있었다. 위탁운영이 시작되면서 달라진 것은 중계소 운영요원의 신분이 방송사 사원에서 한국통신 사원으로 바뀌었을 뿐 시설은 방송사 시설 그대로였고, 근무장소도 그대로였다. 한국통신과 방송사의 시설 이다르기 때문에 위탁운영이 시작되어도 같은 장소에서 근무할 필요가 없었다. 또 월급은 한국통신에서 주고 있었으나 실제로 그 월급은 방송사에서 나오는 돈이었다. 때문에 방송사에서 넘어온 운영요원들은 방송사 사원이라는 기분으로 일하고 있었다.

한편 한국통신측에서도 그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방송망 통합의 필요성을 인식한 사람은 핵심 간부 몇몇에 불과할 뿐 방속국은 체질적 으로 이질적인 조직이었다. 한국통신은 체신부 시절부터 상하간의 위계질서 를존중하는 관료적인 조직임에 비해 공영방송인 KBS는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는 자유분방한 조직이었고, 민영방송인 MBC는 보다 자유스러운 조직이 었다. 따라서 한국통신 간부들은 방송국직원이 섞임으로써 전통적인 미풍양속이 무너지는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은연중에 갖게 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새 며느리가 집안 망치기 위해 들어왔다"는 과격한 반응을 나타내며 그들을 한 가족으로 싸안으려는 노력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특히 한국통신의 품안으로 완전히 흡수되는 것이 아니고 어정쩡하게 위탁 운영체제로한 다리만 걸치고 있는데 대해 실무자들의 불만이 컸다. 때문에양 조직원간의 동거는 물과 기름의 혼합이 되어 좀처럼 화학작용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물과 기름의 혼합이 지속되고 방송망 확장을 위한 투자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점이 노출되자 위탁운영체제에 대한 반성과 함께 통합 운영론이 대두되었다. 즉 방송사 소유로 되어 있는 송신소.중계소 시설을 완전히 한국통신으로 넘겨 한국통신으로 하여금 그 시설의 운용과 유지보수는 물론 투자사업까지 맡게 하는 한편, 그 대가로 방송사로부터 시설사용료를 받는 방안이 검토되었다. 이 방안은 체신부가 제안하여 문공부와 협의과정을 거치게 되었는데 그때까지도 문공부는 송신공사를 설립하여 문공부 산하에 두는 방안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몇가지 대안을 제시하며 반대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위탁운영의 문제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자 체신부 와문공부는 물론 한국통신과 양 방송사가 수차에 걸쳐 협의한 결과 양 방송 사의 송신소와 중계소를 완전히 한국통신에 이관하는 통합운영안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1986년 12월4일 체신부장관 이대순과 문공부장관 이웅희의 입회 하에 한국통신 사장 이우재와 KBS사장 정구호, MBC사장 황선필이 "방송송신.

중계소통합에 관한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1987년 1월1일부터 본격적인 통합 운영체제에 들어가게 되었다.

방송망의 통합운영은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월급문제에서부터 불평이 시작되었다. 방송국쪽에서는 월급이 계속 올라가고 있는데 한국통신에서는 제자 리걸음이라는 것이 첫번째 불평거리였다.

보수문제는 위탁운영 당시부터 대두되었다. 한국통신과 방송국 사이에는월급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좋은 직장으로 알려져 있던 한국 통신의 보수가 방송국에 비하면 상당히 낮았다. 같은 방송국 사이에서도 민영방송인 MBC가 더 높았다. 따라서 위탁운영을 시작할 때는 방송국의 월급수 준에 맞춰 직급을 높여주는 방법으로 해결했으나 기존 직원과의 형평을 고려 하여 계속 높여줄 수는 없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방송국 사원 들의 월급은 올라가는데 한국통신으로 시집간 사원들의 월급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월급문제는 비단 그들만의 불평거리가 아니었다. 한국통신 사원들은 그들대로 불평을 했다. "같은 무선장이인데, 누구는 뭐가 잘나서 많이 받고 누구는뭐가 못나서 적게 받느냐"며 특히 같은 고지에 근무하는 중계소 요원들이 먼저 불평했다. 그런가 하면 한국통신 노조는 한술 더 떠 방송국 수준으로 봉급 인상을 해달라고 아우성쳤다.

또 하나의 불만은 근무지의 제한 내지 변동에 대한 것이었다. 방송사에 근무할 때는 고지의 중계소와 도시의 방송국을 오가며 교대 근무할 수 있었으나한국통신으로 넘어온 뒤에는 고지의 중계소 외에는 갈 곳이 없었다. 자칫하면 고지로 유배당한 죄수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나마 KBS의 경우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어 지방과 중앙간의 교류가 이어지고 있었으나, MBC는 각 지역별로 독자적인 방송국을 갖고 있어지역간의 교류가 이루어지지않았다. 따라서 고향에서만 근무하다 낯선 타향 으로 내던져진 MBC출신들은 생활 연고지를 잃은 데 대한 또다른 불만을 토로했다. 송재극 본부장 등 방송망사업본부 간부들이 중간에 서서 이러한 내부적인불만을 잠재우려 애쓰고 있는 참인데 6.29선언이 발표되었고, 사회 각계각층 에서 표현의 자유가 난무했다. 그러자 그동안 내부적으로만 불만을 토로했던 방송직들은 1987년 8월 전국방송국기능정상화협의회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정부는 방송송신소와 중계소를 즉각 방송사로 환원하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진정서를 발송하는 등 집단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들은 방송망 통합을 언론탄압으로 몰아부쳤다. 즉 "국가기간통신망 통합 계획이라는 미명아래 KBS, MBC 양 방송사의 TV 및 라디오 송신소와 중계소를 국기기관인 한국통신에 통합운영을 시킴으로써 방송언론을 근본적으로 봉쇄 하는데, 이는 또 하나의 방송언론에 대한 탄압조치로 해석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 "방송은 흔히 방송국이라 불리는 연주소에서 제작되어 송신소와 중계소를 통해서만 시청자에게 전달되는 특수성을 가지므로 전국 송.중계소 의 9백여개의 방송매체가 정부기관에 통합운영되고 있다는 것은 방송매체의 최종 전달자인 송.중계소를 장악하여 유사시에 이를 통제하고자 하는 정부의 저의가 숨어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방송사측에서 현 정권의 의사에 반하는 방송을 할 경우 한국통신이 송.중계소에서 전파 송출을 중지시키면 언제라도 방송을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방송망의 통합 취지가 엉뚱한 방향으로 비화되고 있는데도 그것을무마해야 할 한국통신 간부들의 반응은 상반되게 나타났다. 오명 장관과 이 우재 사장은 인사제도와 보수제도를 대폭 개선하여 방송직들의 요구를 수용 하는 안을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처음부터 별도의 조직이었으므로 방송국과 똑같은 수준으로 처우를 개선해 주자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사장은 "방송망 사업본부측에서 요구하는 것은 불법이 아닌 이상 최대한 지원하라"며 사태를 평화적으로 수습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장의 뜻은 관리급 간부인 본부장선에서 차단되었다. 제도 개편작업을 담당하고 있는 간부들이 "현재도 우리보다 많은데 왜 더 주려 하느냐 며 "차라리 차제에 골치 덩어리를 떼어 내버리자"고 역공으로 나왔다.

6.29선언 이후로 전개되는 87년 하반기의 국내 정국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분출되는 욕구불만에다 13대 대통령선거까지 겹쳐 매우 어수선했다. 6.29를 전후해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학생 데모와 노사분규는 사회를 극도의 혼란으로 몰아넣었고, 4파전으로 갈린 대통령선거는 국론을 사분오열시켰다.

그처럼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원상 회복"을 외치던 방송직들은 뜻밖의 정 치권과의 접선으로 엉뚱한 곳에서 원군을 얻게 되었다.

그들에게 행운을 갖다 준 사람은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김용갑이었다. 그는불교 신자로서 관악산 연주암을 자주 찾았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방송직들 과접선이 되었다. 전대통령의 직계로서 로태우 대통령 만들기에도 앞장섰던그는 가족까지 포함해서 2만표나 된다는 방송직들의 주장에 솔깃해 방송직들 을편들고 나섰다.

송재극 본부장의 말을 들어보자.

"13대 대통령선거가 시작될 무렵 방송직들이 관악산 연주암을 자주 다니는김용갑씨를 만나 정치적 협상을 했어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표가 가족까지 포함해서 몇 만표나 되는데, 그들을 방송국으로 환원시켜 준다면 그 표를 전부 몰아 주겠다고 약속한 다음 실제로 6.29선언을 지지하는 성명서도 발표했어요. 그후 로태우 후보가 당선되고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로대통령과 가까운 사이였던 김용갑씨가 환원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니까 의외로 빨리 진행됐어요. 그 무렵 방송망 통합의 주역인 오명 장관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었을까? 1987년 10월 중순 방송직 간부들을 면담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요구조건인 보수와 인사제도를 개선해 주는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정도의 문제는 한국통신에서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방송직들이 한국통신 대전연수원에서철야농성을 하고 민정당 당직 자들을 면담하면서 사태는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는 정권의 운명 을 좌우하는 대통령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어서 어떠한 조치도 취할수 없었다.

대통령선거가 끝나자 방송직들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KBS와 MBC에서 도이에 동조해 송신소.중계소의 환원을 요구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듬해1월 중순 오장관은 체신부 내부에서 문책성 인사를 단행해 전파관리국장과 방송과장을 경질하고 신임 전파관리국장 허필국에게 그 대책을 수립하도록지시했다. 새 정부의 출범 직전인 정권 공백기를 틈타 방송직들은 한국통신 본사로 몰려와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그런데도 경찰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공권 력이 동원되지 않는한 한국통신의 힘으로 데모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후 해결사 사명을 띤 전파관리국장 허필국은 실태 파악을 위해 식장산.

팔공산등의 중계소를 둘러보았는데, 방송직과 통신직이 완전히 구분돼 서로 다른 건물에서 따로따로 근무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말이 통합이지 실상은 통합 이전의 상태 그대로였다.

한국통신은 방송직을 감싸 안으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고 방송직은 그들대로 안기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방송과 통신기술 사이에는기술에 대한 호환성이 없어 통합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같은 마이크로에이브 중계기술을 가지고 호환성 운운하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물과 기름이 합쳐질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즉시 오장관에게 원대복귀시키는 것이 타당하다"고 건의했다. 이해욱차관도 "현재의 정부팀 가지고는 도저히 더 끌고나갈 수 없으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먼저 결심하는게 좋다"며 방송사로의 환원을 건의했다. 이우재 사장도 환원에 찬성했는데 그 이유는 한국통신 내부적인 문제였다.

아무런 돌파구가 보이지 않자 오장관은 차라리 그럴 바에는 능동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하고, 로대통령에게 보고한 다음 방송사로의 환원 방침을 확정했다. 그리하여 1988년 5월19일 체신부장관 오명과 문공부장관 정한모의 입회하에 한국통신 사장 이우재와 KBS사장 정구호, MBC사장 황선필이 방송송신.중계소 이관에 관한 협정"에 서명했는데 이로써 그 말썽많던 방송망통합은 원상회복으로 일단락되었다.

동양매직은 지난해말 향후 신규사업 품목으로 가스보일러와 냉장고를 지목 해관련업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가스보일러는 96년부터、 냉장고는 97년부 터사업을 개시한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같은 계획은 사내외 일각에서의 부정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요 즘그 윤곽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특히 97년 하반기 제품출하를 목표로 한 냉장고 사업의 경우는 7백리터급 대형제품으로 특화한다는 기본방향을 잡고 사업화를 서두르고 있다. 여기에는 처음부터 CFC대체 냉장고를 생산한다는 것도 포함돼 있다.

제품 개발에는 지난해말 수원가전연구소에 신설한 "신규프로젝트그룹"이 앞장서고 있다.

냉장고 개발 실무책임자인 방은주수석연구원은 "7백리터급 냉장고는 가전3 사의 예봉을 피할 수 있을뿐 아니라 최근 소비자들의 대용량 선호추세를 감안할 때 시장경쟁에서 승산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현재 초대형 냉장 고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외산제품의 경우 우리나라 식생활 문화에 부적절한 부분이 지적돼 동양매직이 파고들 수 있는 여지는 충분하다"며 7백리터급 대형시장을 노리게 된 취지를 설명했다.

미국의 월풀、 호주의 이메일사와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동양매직은 이들 회사의 제품을 수입판매하면서 시장성 타진과 유통분야의 기반을 다지는 데도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