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38)

1981년 5월 청와대 경제비서실에서 체신부로 자리를 옮긴 오명 차관은 하고싶은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았다. 우선 한국통신과 데이콤을 설립하는 일이 발등의 불로 떨어져 있었다. 수요 적체로 아우성치는 전화 문제를 해결 하는 것도 못지않게 시급한 과제였다.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3대 과제인 전자 교환기의 컴퓨터, 반도체를 국산화하는 일도 서둘러야 할 난제로 다가왔다.

각 부처가 따로따로 운용하고 있는 통신망을 통합하는 것도 이미 지시받은사항이었다. 자동차전화나 페이저 등 새로운 통신방식의 보급도 해보고 싶은일이었다. 그해 9월에 결정된 88올림픽의 서울 개최는 그를 더욱 바쁘게 했다. 오늘날의 올림픽은 단순한 운동 경기만이 아니다. 그것은 통신과 방송, 전산 등이뒷받침하지 않으면 안되는 첨단 전자기술의 경기이다. 따라서 올림픽 주최 국은 올림픽을 개최할 때마다 대회의 원활한 운영과 신속한 보도를 위한 과학기술을 선보이게 마련인데, 우리나라 역시 88올림픽 때에는 뭔가 새로운 기술을 선보이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짐의 대부분은 정보통신의 담당 부처인 체신부가 떠맡게 되었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려면 경기 현장을 생생히 중계해 주는 TV.라디 오방송과 신문.잡지용 기사 송고에 필요한 방송보도용 통신, 각종 경기장 내부는 물론 경기장과 경기장, 경기장과 선수촌, 경기장과 프레스센터를 연결 하는 현장통신, 그리고 경기의 결과를 신속히 집계.전달하는 전산망 등 각종통신시설이 필요한데 서울올림픽에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통신방식의 하나로 페이저와 휴대전화 등 이동통신 서비스가 거론되었다. 통신.방송용 위성 을 띄우는 문제도 검토되었다. 선진국은 오래 전에 이들 이동통신 서비스를 제공했으나, 우리나라는 안보제일주의를 내세워 전파의 이용을 가급적 억제 해야 한다는 일부의 주장에 밀려 그 보급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올림픽 이라는 국가적인 대명제가 안보제일주의에 대한 재고를 재촉했고, 이어 그해11월에 결정된 86아시아경기대회가 그와 같은 새로운 통신방식의 조기 도입 을 채찍질했다.

올림픽이 아니더라도 이동통신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갈수록 높아졌다. 국회의원들의 아우성도 따가웠지만 그것이 가져다 주는 실익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무렵 이동통신이 발달한 미국이나 스웨덴에서는 택시회사나 화물운송 회사가 이동전화를 사용해 수입을 50% 더 올리기도 했다. 게다가 도시의 교통체증이 심화됨에 따라 그것의 필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었다.

자동차전화를 널리 보급하기로 작심한 오차관은 처음에는 기존의 IMTS방식 을염두에 두고 도청이 불능한 비화기를 개발함으로써 통신보안 문제를 해결 하려 했다. 그러나 멀지 않아 미국에서 새로운 셀룰러전화가 실용화될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과감하게 그 방식을 도입하기로 했다. 이제 남은 일은 전파이용을 억제하고 있는 안기부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셀룰러 전화방식은 전체의 통화구역을 소규모 통화구역인 다수의 셀(cell) 로나누어 각 셀 안에서 통화가 이루어지게 하는 한편, 가입자가 셀과 셀의 경계를 넘어가더라도 통화가 계속 이어지게 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전체의 통화구역을 수많은 셀로 나누는 것은 전파는 유한한 자원이므로 각 주파수 대역별로 동시에 통화할 수 있는 인원이 제한돼 있는데, 이를 각 셀로 분할 하여 전파를 재사용시키면 통화 인원을 몇배로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셀끼리는 같은 전파를 사용할 수 있다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셀룰러 시스템의 기본 목표는 이동전화의 대중화.대용량화였다. 그런데 그것이 보급되기 시작한 1980년대초까지만 해도 대용량화라는 개념이 지금과는전혀 달랐다. 그때는 시카고 같은 대도시에서도 1만명 정도의 가입자를 수용 할 수 있는 용량이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했다. 처음에는 이동전화를 일반 전화통신을 도와 주는 보완적 개념으로 생각했는데, 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에서생활필수품화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파는 날아가면서 그 세력이 약해지는데, 거리가 멀면 멀수록약해지는 정도가 제곱의 비율로 심해진다. 특히 셀룰러전화가 사용되고 있는8백MHz대에서는 거리에 따라 약해지는 정도가 훨씬 심하다. 한 마디로 전파 가 멀리 못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셀룰러전화의 경우, 전파 월북을 막기가 한결 용이한데, 이러한 이점을 설명하면 안기부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차관이 부임하고 나서 체신부와 안기부 사이가 한결 가까워지며대화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차관과 안기부 간부들간의 개인적인 친분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안기부 간부에는 육사출신 선후배가 여럿 있었는데, 오차관과 그들 사이에는 자주 왕래가 있었고 또 대화가 잘 통했다. 그들은오차관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으며 때로는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 그의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따라서 그가 셀룰러전화를 보급할 경우 전파 월북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자 굳이 반대하려 하지 않았다.

"안기부를 설득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였는데, 그 당시 안기부 간부들 이나와 개인적으로 친하기때문에 인간적인 신뢰감을 갖고 있었어요. 내가 하는얘기를 양심적인 사람의 얘기로 들었기 때문에 협조가 잘 되었던 겁니다.

또내가기술적인 문제에 대해 안기부쪽에 도움도 주고 비판도 많이 했어요.

그래서서로 믿고 협조하는 상대가 될 수 있었던거죠. 이동통신문제는 셀룰 러폰기술을 설명하면서 전파 월북은 우리가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게 가장힘있는 설득력이 됐던 겁니다. 또 그 당시 전대통령이 그런 문제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으셨어요. 오히려 전화를 많이 보급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크게 도움이 됐죠." 오명차관의 이야기였다.

오차관과 안기부 사이에 그러한 교감이 이루어질무렵부터 체신부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체신부 간부들은 전파 문제를 가지고 안기 부와 협의하는 것을 가급적 꺼렸다. 그러던 그들이 안기부 간부들을 찾아다니며 "전파는 중요하면서도 유한한 국가 자원이다. 이 자원을 잘 활용하여 국가발전에 이바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셀룰러 시스템의 도입에 문제가 없다는 점을 설명했다.

한마디로 경원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던 안기부를 설득하려는 노력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82년 5월에 부임한 최순달장관은 "세상이 다 이동통신쪽으로 흘러가는데 우리만 못하게 하면 되느냐?"고 반문하며, 직선적이고 적극적인 성격 그대로 "구더기 무서워 장 못담근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생각하자"며 안기부와의 교섭을 독려했다.

한편 5공 정부가 들어설 무렵부터 안기부의 인적 구성에도 많은 변화가 생겨현홍주.김성진같은 인텔리급 간부들이 포진하기 시작했다. 법조계나 국방 과학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던 그들은 전파와 같은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도 비교적 유연성있는 반응을 보였다.

따라서 체신부가 전파의 월북을 막을 수 있는 조치를 취한다는 전제하에 셀룰러전화의 보급을 합의해 왔을 때 안기부측은 전처럼 적극 반대하지 않았다. 실제로 체신부는 전파의 월북을 막기 위해 일부 지역으로 가는 주파수의 출력을 낮추고 또 전파 차폐시설도 설치했다.

그런 다음 안기부의 실무자들과 함께 휴전선 부근으로 가 전파가 얼마나 세게 넘어오는지를 측정했고, 그러한 노력 끝에 안기부의 승인을 얻어낼 수있었다. 당시의 사정을 협상 실무자로부터 들어보자.

"전파가 북쪽으로는 안가고 남족으로만 가게 하는 특별한 조치를 취한다면안기부에서도 동의해 줄 것 아니냐, 그런 조치를 취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동 통신을 보급하자고 했습니다. 기술적으로 한쪽만 보내는 것은 가능하니까요.

전혀안들리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저쪽에서 들어도 무슨 소리인지 못알아들을 정도로 보내면 될 것 아니냐고 했더니, 그렇다면 안기부에서도 동의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그래서 안기부 실무자들과 같이 휴전선 부근의산을 오르내리면서 측정도 여러 차례 했습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체신부가 "이동무선전화현대화계획"을 수립한 것은 19 82년이었다. 그러니까 1978년부터 검토하기 시작한 자동차전화 현대화계획이 그때에야 비로소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이 계획을 확정한 것은 체신부였으나 그것의 추진 주체는 그 해에 발족한 한국 통신이었다. 한국통신은 그해 3월 셀룰러방식이 가능한 외국 회사로 모토롤러 AT&T, NEC, 에릭슨 등을 불러 이동전화 도입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 했다. 그러니까 각 업체로 하여금 그들의 이동통신방식에 관한 설명회를 갖도록 했던 것이다. 그 후 7월에는 모토롤러와 AT&T의 기종중 하나를 택하기로하고 그들 두 회사에 상세한 자료를 요구했으며, 11월에는 모토롤러 제품 의EMX 250으로 결정했다. 그 결과 이듬해인 1983년 8월 조달청이 모토롤러 와셀룰러 시스템에 관한 구매계약을 체결했다. 이처럼 우리나라 최초의 셀룰 러이동전화 시스템이 모토롤러 기종으로 결정된 것은 그 기종이 이미 국내에 서사용하던 기종과 같아 운용면에서 유리한 점도 있었으나, 모토롤러가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선수를 친것이 주효했던 것이다.

"우리가 셀룰러방식을 검토하고 있을 때 모토롤러가 청와대에서 쓰고 있던자사 제품의 IMTS 방식의 교환기를 AMPS 방식인 EMX 250으로 바꿔치기를 해놓았어요. 그리고 한국통신이 도입하려는 교환기 1대를 무료로 주겠다고 나왔어요. 이동전화 시스템에서는 교환기 값이 미미한 겁니다. 오히려 기지국 시설이 훨씬 비쌌죠. 그렇게 해서 모토롤러 기종으로 쉽게 낙착되었던 겁니다. 한국통신 무선과장 황선문의 이야기였다.

계약을 체결한 후 총 38억여원을 투입하여 셀룰러 이동전화를 개통한 것은1984년 5월이었다. 서울 혜화전화국에 설치된 교환기의 용량은 3천회선이었고 서울에 10개의 기지국을 건설하여 서비스를 개시했다. 사용 주파수는 8백MHz였다. 이동전화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시카고와 워싱턴 두 지역에서 셀룰러방식의 이동전화를 보급한 것이 1983년인 점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의 경우 그 보급이 매우 빨랐음을 알수 있다. 미국의 경우, 각 지역마다 독자적 인 이동통신사업자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는데는 그만큼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는 통신사업자가 유일하게 한국통신 하나였고, 또 체신부는 옳다고 생각하면 모든 정책사항을 밀어붙일 때였다. 게다가 88서울올림픽과 86아시안게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88올림픽 은 1980년대의 통신발전에 있어 보이지 않는 손으로 크게 작용했다.

"올림픽이 우리나라 전화의 수요 충족 내지 자동화를 촉진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어요. 그러한 큰 목표가 있기 때문에 무리를 하면서도 끌고 나갈수 있었던 겁니다. 이동통신도 마찬가지죠. 그 전부터 수요가 없었느냐 하면 수요는 충분히 있었어요. 왜 서울에만 보급하느냐, 지방에도 하면 안되느냐는 항의도 많았죠. 그런데 올림픽이란 요인이 있어 안기부를 쉽게 설득할 수있었던 거죠." 한국통신 초대 계획국장 이응효의 주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