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이동통신사업중 서비스 분야만을 위탁받은 소규모 수탁회사로 출발했으나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의 발전 속도는 매우 빨랐다. 창립 첫해인 1984 년의 영업 실적을 살펴보면, 자동차전화는 판매 목표 2천7백대에 실적이 2천 7백31대, 무선호출은 판매 목표 7천9백대에 실적이 7천9백42대로 각각 1백1% 의 실적을 올렸다. 그 결과 4억여원의 수입에 8천만원의 흑자를 냈다. 회사 설립 첫해부터의 흑자, 그것은 첨단기술을 다루는 신생회사로서 매우 고무적 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셀룰러방식의 자동차전화는 국내에서 최초 로 채택한 방식일 뿐만아니라 외국에서도 최신 기술에 속하는 것으로 운용 경험이 없기 때문에 빈번한 소통 장애를 일으켰음에도 순조로운 출발을 할수 있었던 것은 회사의 앞날에 대해 낙관적인 전망을 갖게 했다.
2차연도의 실적은 보다 고무적이었다. 자동차전화는 판매 목표 1천7백대에 2천1백33대로 1백25%, 무선호출은 판매 목표 4천9백대에 5천6백94대로 1백16 %의 실적을 올렸고, 당기순이익이 1억 9천2백만원에 이르렀다. 3차연도에는 비약적인 성과를 거두었는데, 자동차전화는 목표 1천5백대에 실적이 2천4백1 0대로 1백60%, 무선호출은 목표 1만9백70대에 실적이 1만9천12대로 1백73%의 실적을 올렸다.
이처럼 이동통신사업은 출범 첫해부터 흑자를 올리며 순조로운 항해를 시작했는데 주수입원은 무선호출 쪽이었다. 무선호출은 자동차전화에 비해 시설도 간단하고 사용하기도 쉬웠으나 벌이는 쏠쏠했다. 때문에 사원들은 무선 호출을 "효자"라 불렀다. 가입자가 몇 명 되지 않던 자동차전화사업은 사실 상적자를 보이고 있었다. 아무튼 첨단 통신방식인 이동통신이 출범 초기부터 흑자를 올리며 빠른 속도로 발전해 나가자 사람들은 그것을 "황금알을 낳는거위 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동통신의 서비스지역이 확대되고 가입자가 늘어남에 따라 전국 도 단위 로지사가 생기고 회사 수입도 매년 늘었으나, 그에 상응한 활력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수탁회사가 갖는 한계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한국이동통신서비스 주 는 명색만 주식회사일 뿐 한국통신의 관리인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한국통신 소유의 이동통신시설을 맡아 관리해 주는 대가로 소정의 수수료를 받을뿐 투자계획이나 시설의 설치는 물론 통화요금의 수납까지 한국통신이 맡고있었다. 때문에 아무리 노력해서 요금 수입을 늘려도 실제로 떨어지는 것은실비에 해당하는 수수료 수입에 불과했다.
수탁회사로서의 한계는 또 있었다. 책임의 한계였다. 자동차전화와 무선호 출가입자가 급증함에 따라 공급 능력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한국이동통신서비스 주 는 자체 시설을 가지고 자기 계산하에 운영하는 회사가 아니었으므로아우성치는 수요에 적절히 대응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공급 부족이나 통화 품질 불량에 대한 이용자들의 불평이 심심찮게 쏟아져 나왔으나, 그것이한국통신의 책임인지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의 책임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두 회사의 감독기관인 체신부 통신업무과장 한춘구는 당시의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위탁경영을 하다 보니까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하더라도 인센티브가 없다는것이 첫번째 문제점이었고, 또 하나는 차량전화 단말기에 고장이 나서 이용자가 신고해 올 경우 한국이동통신과 한국통신간에 서로 책임 전가를 하는경우가 많았어요. 이처럼 이동통신 시설과 운영이 이원화되다 보니 양자간에 책임 한계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경영관리상 많은 비능률을 초래하고 있었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그 회사를 실권이 있는 통신사업자로 독립시키는 방안이었다. 위탁경영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이동통신사업을 한국통신에서 떼어내 독자적인 경영을 하게 함으로써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다음, 궁극적으로 유선전화와 경쟁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먼저 체신부 쪽에서 대두되었다. 그것은 물론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의 희망사항이기도 했다. 실제로 회사 간부 들은 체신부를 대상으로 로비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체신부가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를 통신사업자로 육성하려 한 데는 단순 히이동통신사업 분야만을 발전시킨다는 차원을 넘어 보다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통신사업에의 경쟁 도입이 그것인 바, 그 배경을 잠깐 살펴보기로 한다. 80년대에 접어들면서 통신산업은 질적.양적인 면에서 많은 의미의 변화를 겪게 되었다. 질적인 면에서는 효율적인 정보통신망의 보유 여부가 기업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관건이 되고, 국가 경제 전체의 효율성 제고는 사회의 정 보화라는 기반 위에서 가능하며, 사회의 정보화는 통신사업의 발전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되었다. 한편 양적인 면에서 볼 때 정보통신산업은 전세계적으로 그 매출액이 5년마다 2배의 속도로 성장하고 있어 2000년대는 가장 비중이 큰 사업으로 부상할 것이 예상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보통신산업은 83년부터 87년까지 5년 동안 연 평균 29.3%의 성장률을 보여 10%인 GNP의 3배 속도로 성장했는데, 그 결과 83년에 GNP의 3.9%를 차지하던 정보 통신산업의 비중이 1987년에는 7.6%로 배증했다.
따라서 선진국에서는 국가의 정책 목표를 기본통신인 전화의 수요충족에서 정보통신의 전략산업화로 바꾸고, 통신의 비교우위 없이는 산업의 경쟁력 확보가 사실상 곤란하다는 판단하에 2000년대의 비교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통한 기술 개발 및 경영 효율화를 서두르는 한편, 독점체제에서 경쟁체제로의 전환을 과감히 추진하고 있었다.
한편, 1987년 전화 1천만대의 보급으로 1가구 1전화시대를 개막한 체신부 는1가구 1컴퓨터시대로 정책 목표를 전환하는 한편, 정보통신산업을 미래의 핵심 전략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민간의 활력과 창의력을 유입 시켜야 한다는 전제하에,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통신사업에의 경쟁 도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1988년 3월 오명 체신부장관은 신임 로태우 대통령에게 "통신사업의 영역 별전문화"라는 제목으로 이동통신 전담회사의 육성 방안을 보고했다. 즉, 전화사업은 한국통신이, 데이타통신사업은 데이콤이, 연근해통신사업은 한국항만전화 주 그리고 이동통신사업은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가 맡아 전문적 으로 발전시켜 나가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를 공중통신사업자로 지정하여 자율권을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통신사 업을 각 분야별로 전문화시켜 육성한 다음 어느 단계에 이르면 전 통신사업 에경쟁을 도입한다는 장기적인 구상을 덧붙였다. 그 결과 그해 4월 회사는 통신사업자로 지정되었고, 회사의 명칭이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식회사에서 한국이동통신주식회사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식회사" 라는 이름에서 "서비스"라는 세 글자를 떼어내는데 4년이 걸렸던 것이다.
체신부가 한국통신에 한국이동통신(주)의 자립 육성방안을 수립하여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1987년 10월이었다. 그러나 한국통신은 애초부터 자회사의 독립에 반대했다. 자회사로 출발할 때는 한국통신이 1백%출자한 회사였으므로 같은 회사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통신사업자로 지정되면 비록 1백%의 주식을 갖고 있다해도 경쟁회사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자회사로 출발 할당시만 해도 자동전화나 무선호출사업은 그 성장 가능성이 극히 불투명한 소규모 사업에 불과했다. 그런데 자회사로 출범한 지 불과 몇년 사이에 이동 통신사업은 가장 활기있게 뻗어가는 성장산업으로 발돋움했다. 따라서 한국 통신의 입장에서는 토끼를 호랑이로 키워 울타리 밖으로 내몰 수는 없었다.
특히짭짤한 이익을 내고 있는 무선호출사업은 더욱 내놓기 아까운 사업이었다. 그 당시 한국통신에 대한 감독은 체신부 통신업무과가 맡고 있었고, 통신 업무과장 한춘구는 직선적인 성격의 원칙주의자였다.
통신업무과장에 임명되기 직전 1년 반 동안 미국의 AT&T에서 연수를 받은바있는 그는 84년에 지역 단위로 분할된 AT&T가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것을보고 전화사업에도 경쟁 도입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어 한국 통신을 감독할 자리에 앉은 그는 전화의 대량 공급과 함께 비대해 가는 한국 통신을 전처럼 물리적으로 규제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느끼고, 경쟁을 통해 자율적으로 값을 내리고 서비스를 개선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필요성 을절감했다. 이에 앞서 정부는 86년 정부투자기관을 단계적으로 민영화하기 로결정하고 한국통신도 정부 보유 주식의 49%를 공개하기로 방침을 정해 놓고있었다.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를 독립시키는 안에 대해 한국통신이 난색을 표하 자한춘구 과장은 한국통신에서 직영하는 안을 제시했다. 실소유자와 수탁자 로이원화되어 서비스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이동통신사업을 발전시키려면 자기 책임하에 운영케 하는 방안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 자한국통신은 흡수하는 방안대신 독립시키는 방안을 택했다.
"한국통신측은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를 통신사업자로 독립시키는 것을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이 회사를 독립시켜 독자경영을 하도록 할 수 없다면그회사를 해체해서 한국통신이 흡수하는 방안을 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몇달 검토하더니 자회사의 직원을 한국통신의 사원으로 임명하는 것이 선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애써 만들어 놓은 자회사의 사장 자리를 없애는 것도문제가 있었던지 결국 독립시키는 안을 택했습니다."87년 12월 한국통신이 체신부에 내놓은 안은 일본이나 홍콩의 예와 같이 이동통신사업자를 차량전화와 무선호출 양자로 나누어 2개의 회사를 설립하는것이었다. 그런데 차량 전화는 가입자 수가 적어 분리 운영할 경우 적자가 예상된다는 한국이동통신 서비스(주)의 지적에 따라 새로운 사업자는 두 사업을일괄하여 운영하도록 체신부가 결정했다.
한국이동통신(주)이 통신사업자로 지정된 것은 88년 4월30일이었다. 그때부터 그 회사는 고도성장의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자기 계산하에 투자계획을 세우고 시설증설을 함으로써 급증하는 이동통신 수요에 부응할 수있어 매년 2배의 성장을 구가할 수 있었다. 그 예로 가입자의 증가 상황을 살펴보자. 이동전화의 가입자는 88서울올림픽 이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서울올림픽 이열린 88년에 2만명이던 이동전화 가입자 수는 89년에 4만명, 90년에 8만명 91년에 16만6천명, 다시 92년에 27만2천명이 되는 등 매년 두배씩 늘어났다. 무선호출 가입자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88년 10만명이던 무선호출 가입 자는 89년에 20만명, 90년에 42만명, 91년에 85만명, 다시 92년에는 1백45만 명을 기록하여 역시 두배의 성장을 나타냈고 그때부터 무선호출 대중화시대 가꽃피게 되었다. 통신사업자로 지정한 효과가 곧바로 나타났던 것이다.
"통신사업자로 지정받기 전에는 가입자의 증가율이 연평균 30%를 넘지 못했으나 88년 이후에는 연평균 1백%씩 증가했어요. 그것이 바로 통신사업자로 지정한 효과라 하겠는데, 88올림픽도 부분적으로 작용했어요. 88올림픽을 계기로 휴대전화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휴대전화가 엄청난 수요를 유발했죠.
" 한국이동통신 전무 성태경의 주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