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의 대량공급이 어떻게 가능했느냐 하는 문제는 돈.사람.기술 세가지 측면에서 보아야 합니다. 우선 재원문제는 전화요금의 인상으로 해결했어요.
전화요금이8원에서 12원으로 인상되었던 게 80년 1월이었는데, 81년 6월에1 5원으로, 다시 12월에 20원으로 인상했어요. 그러니까 공사설립을 눈앞에 두고 두 차례에 걸쳐 12원에서 20원으로 대폭 인상했던 겁니다. 그처럼 공사설립을 앞두고 2년동안에 전화요금을 2배 반이나 올린 것이 한국통신이 안정적 으로 출범할 수 있는 터전이 되었던 겁니다. 그게 가장 중요한 요소였어요." 한국통신 설립작업 당시 실무 책임자의 한 사람이었던 이인학과장의 주장 처럼 한국통신이 설립된 후 전화혁명이 가능했던 배경은 투자재원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는데 있었다.
전화의 대량 공급을 위한 투자재원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공사 설립이 논의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투자재원의 확보방안은 앞에서 설명한 전화 요금 인상에 그치지 않았다. 전신전화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 임시조치법을 마련한데서 전화문제를 해결하려는 체신부의 의지를 엿볼 수 있고, 그로부터 전화 대량공급의 기틀이 다져지기 시작했다.
70년대말까지의 통신에 대한 투자는 주로 통신사업에서 거둬들이는 수입에 의존했다. 따라서 일정한 범위를 벗어날 수 없는 단조로운 투자가 반복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보니 통신사업의 발전속도는 매우 느렸으나 반면에재무구조는 비교적 탄탄했다.
78년말 현재 세계 주요 통신사업자의 총자본에 대한 타인자본의 비율을 보 면미국의 벨시스템이 57.3%, 일본의 NTT가 68.1%, KDD가 43.3%인데 비해 우리나라는 11.3%에 불과했다. 그러한 재무구조로 볼때 우리나라 통신사업 자는 외부자금 투자를 계속 확대하더라도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연간 30만대의 전화를 공급하던 70년대 하반까지만 해도 외부자금의 필요 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연간 1백만대를 공급하자면 자체 수입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연간 1천만대의 공급계획을 수립하던 79년 체신부는 과감하게 외부자금을 끌어들이기로 하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방안으로 "통신시설 확장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제정했다.
80년 1월부터 시행된 "임시조치법"은 전문 9조로 된 짤막한 법이었는데, 그핵심은 전신전화채권의 발행이었다. 이 법의 시행으로 전화가설을 희망하는사람은 소정의 전신전화채권을 매입해야 했으며, 체신부는 그것의 판매로 조성된 자금을 투자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이 법은 또한 우편대체자금 까지도 통신사업특별회계에 차입시켜 투자재원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이 법의 제정 목적은 이처럼 투자재원의 마련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나, 그때까지 계속된 일반회계로의 자금 전출을 막자는 소극적인 뜻도 포함돼 있었다. 당시의 체신부 기획관리실장 정규석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79년초에 "통신시설 확장에 관한 임시조치법"의 제정을 추진해서 그해 12 월에 공포했는데, 그 법을 제정하는데는 두가지 목적이 있었어요. 하나는 전화대량 공급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자는 것으로 전신전화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길을 터놨고, 또 하나는 과거에는 통신사업특별회계 이익잉여금을 경제기 획원에 빼앗겼는데 우리사정도 이만큼 급박하니 앞으로는 예탁금을 못내겠다는뜻도 그 속에 포함돼 있었죠." 이와 같은 투자재원 확보 방안을 마련함과 동시에 체신부는 80년부터 동원 할수 있는 외부자금은 모두 동원하기로 했다. 당시에 계획된 외부자금의 규모를 살펴보면 전신전화채권이 9백23억원, 우편대체자금이 4백10억원, 차관 금이 1천1백13억원이었는데, 여기에 가입자들에게 되돌려 주게 되어 있는 설비부담금을 합치면 3천3백83억원이 되었다. 79년도의 1천46억원에 비해 3배 나늘어난 것이었다. 이러한 규모의 외부자금에다 통신사업 자체 수입에 의한 투자비를 더한 80년도의 총 투자비는 6천4백51억원이었는데, 이는 전년도에 비해 1백21%나 증가한 것이었다. 그 후에는 매년 그러한 규모의 투자를 계속 함으로써 80년대에는 연 평균 1백만대 이상의 전화를 공급할 수 있었다.
89년 12월 31일까지 10년 동안만 효력을 갖는 한시법으로 제정된 이 법은82년 1월 한국통신이 발족하면서 그 명칭을 "공중전기통신시설 확장에 관한임시조치법 으로 바꾸었을 뿐 그 효력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87년에 들어전국 전화 자동화가 이루어지고 전화의 수요가 충족되자 당초의 유효기간에 서 2년 앞당겨 87년 12월 31일 이 법을 폐지했다.
전신전화채권의 판매에 의한 자금 조달은 1조 2천5백21억원으로 그 기간의총 통신투자비 9조 9천1백91억원의 12.6%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만큼 우리나라 전기통신시설 현대화에 공헌을 한 셈이다.
"79년은 통신사업에 있어 재정 기반을 확립한 중요한 해였습니다. 전신전화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 임시조치법이 그 당시 제정됐는데, 당시의 이재설 장관이나 이경식 차관의 주문이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은 총동원하라는 것이어서우편대체자금까지도 끌어들일 수 있도록 하는 법이 제정됐습니다. 전신전화채권의 판매로 1조2천억원 정도 내자동원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만일그렇지 못했다면 한국통신이 사채를 발행했을 겁니다. 사채를 발행하려면 절차도 복잡하고 또 많은 이자를 지급해야 할 테니까 그만큼 덕을 본 셈이죠." 체신부 기획예산담당관으로 "임시조치법"의 제정작업에 참여했던 이해욱의주장이었다. "임시조치법"제정에 의한 전신전화채권의 판매 이외의 또 하나의 중요한 투자재원 확보 방안은 전술한 바 있는 전화요금의 인상이었다. 유치 가능한 외부자금은 모두 끌어들이기로 결정한 체신부는 80년 1월 전화요금 도수료를 8원에서 12원으로 50%나 인상했다. 이때의 전화요금 인상은 공사화와는 관계없이 수입 규모를 늘려 투자재원을 극대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어 공사 출범을 7개월 앞둔 81년 6월에는 15원으로, 다시 20여일 앞둔 12월에는 20원 으로 인상했는데, 이때의 요금 인상은 순전히 공사 발족에 대비하기 위한 의도적인 조치였다. 즉, 공사 출범과 함께 예상되는 대표적인 인건비의 인상과 막대한 투자비의 증가를 요금 수입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요금 인상은 전화의 대량 공급에 따른 논리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요금 인상은 전화의 대량 공급에 따른 또 다른 요금 수입의 증가와 함께 예상밖의 수입 호조로 나타나 한국통신이 출범과 동시에 순조로운 항해를 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통신이 설립되기 전부터 체신부는 엄청나게 소요되는 투자비용에 충당 할목적으로 전화가입청약금을 미리 받는 형식으로 전화를 선매했다. 따라서 한국통신은 출발 당시부터 이러한 부채 등 상당한 액수의 단기부채를 안게되었다. 한국통신의 자금 부족을 염려한 체신부는 한국통신이 출발 이후 10 년동안 2천억원의 사채를 발행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이에 따라 한국통신은 출범 첫해인 82년 상반기에 9백27억원의 사채를 발행했으나 그 후에는한건도 발행하지 않았다. 전화요금 수입이 급증하면서 자금 사정이 예상외로 호전됐기 때문이다. 자금 부족을 염려한 이우재사장이 무재고운동을 벌여 재고로 남아 있는 물자를 전부 사용한 다음 물자를 구입케 한 것도 자금 사정 의 호전에 한 몫을 했다.
"공사 설립 초년도에는 자금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는데 3.4분기에 따져보니까 더이상 사채를 발행할 필요가 없더라구요. 우선 전화요금 수입이 급증하면서 자금 사정이 호전된게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죠. 거기에 덧붙여 무 재고시스템을 도입, 재고를 없애는 대신 그 돈을 투자비로 돌렸던 것도 자금 사정 호전의 한 요인이 됐어요. 약 1천4백억원정도의 물자구입비를 투자비로 활용할 수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전자교환기를 도입할 때 10%의 관세를 부담했는데 이것을 면제받는 영세율을 추진한 결과 82년부터 영세율 적용을 받게 된 것도 상당한 도움이 되었어요. 이러한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82년 하반기 이후에는 채권을 발행할 필요가 없게 됐어요. 한국통신초대 회계부장 강광희의 이야기였다.
그 무렵 체신부의 정책도 서비스의 개선보다는 시설투자에 우선순위를 두었는데 그것 역시 재원확충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전화의 2대 과제는 전화수요의 충족과 통화품질의 향상이었는데 그중 통화품질보다 수요충족에 핀트를 맞추었다. 전화의 경우 가입자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만큼 이용을유발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공급을 늘림으로써 요금수입을 확대시켜 공급 문제를 가급적 빨리 해결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오명차관의 주장을 들어보자.
"그 당시 사회적인 비난이 나올 소지가 상당히 있었지만 서비스개선에 대한투자보다는 시설확대에 대한 투자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기로 했어요. 양을 늘려야 돈이 더 많이 들어오기 때문이죠. 서비스개선에 투자를 하면 그 돈이 회수가 안됩니다. 그래서 양을 늘려 돈을 벌고 그렇게 번 돈 가지고 서비스 를 개선하자고 했던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러한 정책이 성공했던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