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9년 5월 세종임금은 즉위하자마자 그때까지 2단위(그전에는 4단위)로운용돼오던 봉수제도를 5단위로 고치고 전국루트도 일제히 정비했다. 이어서6월에는 대마안를 정벌해 남쪽의 근심을 덜었다. 취임후 제일 먼저 서둔 것이 정보통신의 정비요, 다음이 국방문제인 셈이다.
또한 대왕 8년에는 박연을 시켜 아악을 정리하고 이어 15년에는 김종서로하여금 6진을 개척하게 해 압록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확정했으며, 1496년에는한글을 반포하였으니 올해로 꼭 5백50년전의 일이다.
한글을 부호학적으로 살펴보면 천.지.인 삼재 사상에 기초를 둔 홀소리 3개와 오음에 기초를 둔 닿소리 5개를 합해 도합 8개의 기호에 근거하는데,이는 2의 3승으로 3비트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봉화 또한 5단위라 2진부호 체계로 낮에는 연기(수), 밤에는 횃불(봉)로변방의 국경정보를 보냈는데 원시적이기는 하지만 디지털 광전송장치임이 분명하다. 중국이 4단위임을 상기할 때 한국 5단위 봉수는 어떤 나라에서도 그유래를 찾을 수 없다.
봉수 5비트는 32개의 다른 정보를 표현할 수 있어 한글 28자를 전송하고도남는다. 그렇지만 봉수를 관장한 병조(국방부)와 한글을 담당했던 집현전이다른 기관이어서 그런지 둘 사이는 결국 연결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후 4백~5백년이 지난 후 텔레타이프 부호체계에서 구체적으로 계승된 바 있으며, 곧바로 1바이트 셈틀(컴퓨터) 정보처리의 기본구성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고안만 최초로 했을 뿐 더 이상의 진보는 없었다.
우리는 현대를 정보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그 근간을 이룬 것은 디지털기술이다. 그런 면에서 5비트 디지털 광전송장치를 최초로 고안했던 세종시대가 정보시대의 원점이 됨은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한글전송과 봉수의 연결 말고도 역사의 아쉬움은 또 있다. 만약 6진을 개척하면서 한글을 가르치는 문화사업을 곁들였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점이다.
여진족은 지금까지 동화되지 않고 정체성를 유지했을 것이며, 중국도 한자와함께 음운은 한글로 표기했을 것이다.
대마안 정벌 이후 왜인들에게 한글을 보급했더라면 대마도를 자기땅이라고우기지도 않았을 것이지만 일본은 문자와 일상생활의 이중고에서 벗어날 수있는 좋은 기회를 상실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들은 삐삐의 보급에서 일본을 앞지르고 있으며, 개인용 셈틀의 보급률(보급대수는 아님)에서도 일본을 앞지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로 볼 때 중국과 일본은 문자생활과 정보생활의 괴리를 수정하지 않는 한 서양은 물론이고 정보시대에 있어 한국에도 뒤질 것이 뻔하다. 한자는 로마자를 기본으로하는 현재의 정보시스템으로는 입력하기도 불편하고 무른모(소프트웨어)의개발과 이용이 불편하다.
일본은 중국보다 조금 나은 형편이라고 하지만 가나문자로서는 지극히 불완전해 한자의 도움 없이는 문자생활이든 정보생활이든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대안은 한글음성기호(한글과 약간 차이가 있음)를 빌려서 쓰는 일인데,한글의 음성기호적 성격은 알파벳을 닮았고, 모아쓰기는 음절문자적 요소를다같이 지니고 있어 한자와 로마자에 적용 가능하며, 입력방식과 내부처리에도편리하다.
이러한 절묘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양면성을 살리기보다는 완성형이니 조합형이니를 가지고 우리들 내부에서 갈등을 지속해 왔다. 이제 우리도일본과 중국의 정보시스템에 한글 음성기호를 적용할 채비를 갖추자. 이를위해서는 먼저 자기확신을 가져야 한다.
역사는 반복하지는 않지만 기회는 반복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