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D램 가격파동이 준 교훈

속락을 거듭하던 D램 가격이 한·일 반도체 생산업체들의 협력으로 일단안정세를 되찾았다. 이는 한·일간 협력의 새 장을 연 것인 동시에 우리에겐 세계시장에서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무엇인가를 해냈다는 중요한 경험을안겨준 일이기도 하다.

주도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경쟁우위를 유지하는 데 있어 중요한 문제였지만 특히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출범한 이후 산업에 있어서중요한 문제가 됐다.

그러나 아직은 D램 시장이 지난해까지의 실적에 기댄 호황의 전망을 충족시킬 만큼 충분히 안정된 것은 아니다.

이에 따른 국내 경기 전망의 불투명함은 만발하는 선진국 구호를 무색하게만들 만큼 위협적이다. 우리의 경제가 D램 하나에 너무 기대어 있었음이 이번 경험을 통해 분명해졌다.

한 사회의 경제 전체에서 단일 품목의 비중이 지나치게 클 경우 경기변동에 매우 민감해지고 따라서 상황이 나빠질 경우 심각한 사회불안이 야기될수 있음을 우리는 사회주의 혁명을 겪은 쿠바 등의 역사적 사례에서 적잖이발견할 수 있다.

사탕수수 하나에 기대다시피했던 쿠바의 전철을 우리가 되밟을 생각이 아니라면 비교우위라는 다분히 현학적인 논리에 경도되는 것을 경계해야만 한다. 현실세계의 힘의 논리를 무시한 지극히 낭만적인 우리 사회의 비교우위론은 그 뿌리가 이미 세계를 제패한 미국적 토양에서나 자랄 수 있었던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이미 우위를 확보한 분야를 소홀히 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어느 분야가 됐든 앞서 우위를 확보하는 분야는 있게 마련이고, 또한 이런 우위확보는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산업 전반이 일정한 균형을 유지하지 않으면 심각한불안정이 초래되고 결국 한 사회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완벽한 균형이 변화·발전을 가져올 수도 없지만 또한 심한 불균형이 한사회를 본질적으로 바꿔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산업문명을열어준 자연과학이 주는 충고다.

이제부터는 속된 표현으로 「잘 나가는 산업」에만 힘을 집중시키는 근시안적 산업정책을 수정해야 할 때다. 하나의 앞선 산업이 주변산업을 이끌어나가는 협력없이는 우리 사회 전반의 지속적인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연관산업에 파급효과가 크게 미치는 산업일수록 해당 기업의 영향력은 국내는물론 국제사회적으로도 커지게 마련이고 이런 영향력의 축적 및 확산이 우리사회를 진정으로 선진국 대열에 오르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세계화 구호가 난무하는 사이에 우리는 과연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한 길을 뚫을 우리 정체성의 핵을 찾아냈는가를 한번 냉정히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아직 세계시장에서 신기술의 개념을 선언하고 기술표준을 주도해미래를 견인해낼 선진기술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 고작해야 남들이 세워놓은 개념을 실행시킬 하드웨어를 뒤따라가며 생산해내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연관산업 파급효과도 그다지 크지 못하다.

앞선 지혜의 축적없이 덩치만 크다고 선진기업, 선진국가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도 그저 덩치 키우기에만 힘을 집중할 시기는 지났다. 이제는 SW·컨텐츠의 질이 덩치를 누를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야만 한다. 몸집만 큰 바보를 잘 성장했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다양한 산업의 균형있는 성장을 위해, 나아가 우리가 그토록 외쳐대는 구호처럼 선진국으로 올라서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도 이제 통상의 문을 완전히열어젖히기에 앞서 思考의 문부터 활짝 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열린 사회에서 무한히 사고의 영역을 넓혀나가고 거침없이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향유하지 않고는 컨텐츠 중심의 미래 세계에서 주역으로 자리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고속성장의 맛에 길들여진 사회를 만족시킬 수 없게 될것이고 사회 전반에 새로운 불안정의 요소가 싹트게 될 것이다. 이번 D램 가격파동으로부터 우리는 보다 많은 깨달음을 얻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