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의 자료기지(데이터베이스)나 정보의 저장방식이 바위새김그림(암각화)이라면 역사시대의 자료기지는 바위나 놋 등에 새긴 금석문이다. 바위새김은 유목 이동민족이 작성한 자료기지로 그 의미나 만든 동기는 아직 정확히 해독되지 않고 있지만, 금석문들은 대부분 해독돼 역사시대의 주요한가치가 있는 고고학적 자료들로 쓰이고 있다. 서양의 금석문 중에서는 신전이나 돌기둥에 새겨져 그 규모가 장대한 것들이 많지만 동양문화를 대표한다는 중국의 비문들은 장대하다기보다는 서체의 예술성을 중요시한 탓인지 아기자기한 맛이 강하다.
동양 비석의 대표적인 유물을 들자면 광개토대왕비와 몽골초원에 서 있는옛 돌궐 비문을 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광개토대왕비는 북위 41도에위치한 국내성에 세워진 4각형의 각석응회암으로 6.34m나 되는 거대한 자연석에다 1천8백2자의 한자를 새긴 비문이다. 서기 414년에 세워진 것으로 韓·中·日의 고대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한편 돌궐 비문의 하나인 퀼 티킨 비문은 375㎝로 북위 48도, 동경 1백2도(몽골 중부의 호르콘강 부근 코쇼차이담 호수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면(뒷면)은 한문으로, 다른 면은 돌궐어로 새겨진 이 비문은 양티해의 열일곱째날(731년 2월 27일)에 죽은 퀼 티킨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고, 조금떨어진 곳에는 이보다 큰, 735년에 세워진 빌케 카칸의 비석이 있다. 두 비석은 투르크 제국의 광활한 영토를 건설하고 영토를 지키기 위해 백성과 지도자들이 해야 할 일들을 기록해 놓고 있다고 한다. 이중에서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고구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외에도 8세기 전후 시베리아 남부, 오늘날 몽골지역을 중심으로 한 광활한 지역은 정치·군사·사회·문화면에 걸쳐 북방제국의 귀중한 역사적 정보를 제공하는 세계적인 금석문의 현장이다.
이 비문의 참된 가치는 무엇보다도 북방민족의 역사를 중국인의 시각이 아닌, 북방민족 자신의 시각으로 기록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사실 우리들이 들먹이고 있는 동이·몽골·흉노·돌궐·남만 등은 중국인의 시각으로 기술한야만인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이외 다른 기록이 없기 때문에 마치 보통 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한술 더 떠서 중국사서의 기록을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이를 사대주의라 비난하지만 달리 기록이 없는 한 어쩔 수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광개토대왕비나 옛 돌궐 비문은 중국의 사서를 참조할 때 상당한 주의를 요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지난 7월 초순 이 비문을 답사한 것은 전혀 우연한 기회였다. 제6차 한몽학술답사단을 무조건 따라나선 게 계기가 되었다. 한반도에서 시작된 유라시아를 이은 최단 하이웨이는 비단길보다는 초원길이라는 사실은 섬광처럼 나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몽골, 알타이산맥과 키르기스초원, 우랄산맥과 볼가강으로 이어지는 초원길이 최단길이라는 지리지식을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이들 초원길의 이정표로 서 있는 것이 광개토대왕비이고 옛 투르크 비문이라는 사실도 비로소 알게 되었다. 특히 광개토대왕 비문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내게는 벅찬 감동이었다. 우리는 흔히 韓·日 관계사만을 중심으로 광개토대왕 비문을 이해하고 있지만이는 너무나 협소한 시각이다. 광대토대왕 비문을 이해할 때 왜나 백제의 해양세력을 격파하고 대륙국가였던 고구려가 새로운 해양세력으로 등장했다는기록을 제쳐 두고 사소한 문자조작에 연연하는 태도는 시정돼야 한다. 그뿐아니라 유라시아 초원길을 시작하는 원점 좌표로 이해해야 한다. 옛 투르크비문이 광개토대왕 비문보다 3백년이 뒤진다는 사실은 초원길의 초입에서 점차 서진한 것이 아닌지 면밀한 검토를 요한다. 동쪽으로 고구려와 서쪽으로동로마(터키의 비잔틴)제국과 교류했던 투르크 제국을 이해하는 것이 한국사를 자주적으로 해석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하다. 투르크를 중국사서의 시각으로, 중국민을 괴롭힌 북방 오랑캐로 인식해서는 안될 것이다.
陳 庸 玉
〈경희대 전자전파공학계열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