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반도체 선발업체들의 전철 밟지 말아야

지난 89년 9월 세계 D램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 반도체업체들은 급속한가격하락에 대응한다는 취지아래 거의 같은 시기에 1MD램 감산계획을 발표했다.

일본업체들은 80년대 중반 미국업체들의 반덤핑제소로 미국과 반도체무역에관한 협정(SCTA)을 체결한 뒤 반도체 가격이 급등하자 주도적 공급자로서 막대한 거품이익까지 챙겨 재투자에 경쟁적으로 나섰고 이에 따른 공급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하자 수익성 보전을 위해 이같은 조치를 취했었다.

반면 당시 D램 사업에 본격 참여한 한국업체들은 가동률을 높여 사업을 안정화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터라 시장상황에 구애받지 않고 과감한 투자를 감행, 의외로 빨리 회복된 시장에서 디딤돌을 마련했다. 이후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미국 반도체업체들과 마찰을 빚어 지난 92년에는 미국·유럽으로부터반덤핑 제소를 당하나 미국의 반덤핑조치는 이 때에도 D램 가격 급등을 초래, 한국·일본은 물론 한국업체들을 제소했던 미국의 D램 공급업체들까지막대한 이익을 보게 됐다.

과감한 선행투자를 했던 한국업체들은 이후 주도적인 공급업체로 부상하며수년간 쌓은 여력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생산능력을 대폭 확대하고 일본업체들도 4MD램 및 16MD램에서의 경험을 거울삼아 역시 경쟁적인 투자대열에가세했다. 90년대 중반들어서는 대만업체들까지 D램 등 메모리시장 참여를위해 대대적인 투자를 했다.

이에 따라 빠듯했던 D램 수급이 지난해 말경에는 약한 공급과잉 국면으로반전됐고 올들어서는 가격이 걷잡을 수 없이 폭락하자 한국업체들과 일본의주요 D램 공급업체들이 생산량 감축 또는 증산동결 계획을 잇따라 발표, 몇년 전의 전철을 되밟고 있다.

그러나 수년전 일본업체들이 생산량을 조절할때 한국업체들이 했던것 처럼대만업체들은 지금 양산궤도로 올려놓기 위한 증산에 여념이 없다. 지금 한국업체들은 『우리는 그동안의 호황때 여력을 비축한 반면 대만업체들은 어려운 시기에 시장에 진입해서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자신감이 섞인 우려를 하고 있지만 이 또한 과거 한국업체들이 메모리 사업에 뛰어들었을 때 일본업체들이 했던 「충고」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문제는 일본은 한국업체들에게 D램시장의 절반을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가전용 비메모리제품 등에서의 강세에 힘입어 여전히 세계적인 반도체 강국으로서의 탄탄한 입지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국내업체들은 목을 매고 있는 D램시장에서의 지위가 흔들리거나 시장 자체적인 변동이 있을 경우 존립 자체를 위협받게 될 우려가 높다는 점이다.

물론 한국업체들만 특정품목에 대한 의존이 높은 것은 아니며 사업구조가특화돼 있다는 것이 꼭 좋지 않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지난해 NEC를 비롯한 일본업체들은 대부분 D램 등 메모리 의존도가 절반 정도에 불과해 비교적 균형잡혀 있는 반면 세계 최대의 반도체공급업체인 인텔은 마이크로프로세서 등 마이크로제품이 전체 매출의 94%를 차지했고 한국업체들은 메모리 의존도가 평균 90%를 넘었다. 문제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경우는 그 자체로 세트나 주변 부품기술을 이끌어가는 기술·시장 주도형 제품인데 반해D램은 시장이 크고 안정성은 있으나 「따라가는」 제품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D램에 편중된 국내 반도체산업은 구조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세트부문과의밀접한 공조체제를 구축하고 세트의 설계기술을 향상시키는 데 과거 반도체개발에 쏟아부었던 투자에 못지 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국내에서 필요한 반도체를 국내 세트업체와 반도체업체가 협력해서 개발하고 생산량의 일정 부분은 국내에서 소화하는 체제가 구축되지 않고서는 반도체나 세트 모두 제대로 된 경쟁력을 갖추기 어려움은 물론 기술이나 통상·시장상황이 변할 때마다 몸살을 앓을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