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전자산업 부진의 책임

최근 정부의 산업동향 및 경기부진에 관한 발표나 이와 관련된 언론보도들을 보면 반도체산업이 경기침체의 주범인 것 같은 인상이다. 수출이 부진한것이 반도체 때문이며 전반적인 산업경기 침체 또한 반도체와 결부돼 있는것 같은 느낌이다.

이같은 분석과 주장들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반도체 수출 증가세가 둔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전반적으로 기업이나 정부의 목표달성이 큰 차질을 빚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세계적인 반도체 가격폭락으로 인한 매출감소가 반도체업체들의 책임만은 아니며 우리 반도체업체들이 외국 경쟁업체들에 비해 못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는 국가 모두가 이같은 상황에 처해 있으나 다만 한국은 반도체 가운데서도 올들어 상황이 어렵게 된 메모리에 대한의존이 지나치게 높아 영향의 강도가 큰 것뿐이다. 반도체업체 관계자들도『주식이 잘될 때는 아무 말이 없다가 주식이 폭락하면 증권사 담당직원에게책임의 화살을 돌리는 것과 같다』며 책임전가성 분위기에 적지 않은 불만을보이고 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반도체를 포함한 전자산업에 대해 그동안 정부가 했던역할과 앞으로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묻고자 한다. 정부는 그동안 소위 첨단산업에 초점을 맞춘 산업육성 정책을 펴왔다. 그러나 반도체나 브라운관 등 첨단 전자산업은 내로라하는 재벌 중에서도 손꼽는 재벌들이 장악,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자금을 투자하고 연구개발을 해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업종이나 산업에 대해 정부가 지원 운운하는 것은 일종의 蛇足이며 이들에 대한 유무형의 지원이 현실적으로 보다 절박하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중견, 중소업체들게 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지적도 적지 않았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반도체 등 첨단 매머드 업종이 호황일 때 정부는 중견, 중소 전자업체들의어려움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수출이나 전체적인 산업성장 등 총량적인 면을 우선시 할 수밖에 없는 관계당국의 고충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중소업체들은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껴왔다.

지난 수년동안 중견, 중소 전자업체들은 수요, 인력, 임금, 금리, 공장부지 문제 등 제반 환경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위축되거나 외국으로 도피해 갔다. 그러나 정부는 이같은 상황을 직시하기보다는 대기업들에 초점을 맞춰「세계 진출」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했었다. 산업공동화에 대한 우려도 꾸준히 제기됐지만 이는 소수의견으로 치부됐다. 이제 믿었던 첨단업종 대기업들의 수출이 차질을 빚자 정부가 위기니 산업공동화니 하며 대책을 마련한다,산업체를 방문한다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동안 대책마련을 호소해왔던 중견, 중소 업체들에는 섭섭한 일이 될 수 있다.

반도체 가격의 폭락이나 전자경기의 전반적인 침체에 따른 수출부진을 그누구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 다만 수출비중이 큰 일부 업종에지나치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정작 수십년간 국내 전자산업을 이끌어온 중견, 중소 업체들에 소홀했던 점은 분명 정부당국의 책임이다.

첨단업종을 이끌어가는 대기업들에 필요한 것은 개발자금 등 물질적인 지원보다는 세계적인 기업환경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정책적인 제도개선과 융통성을 부여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만성적인 인력부족과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는 중견, 중소업체들에는 정부의 자금지원 등 물질적인 배려가 하나라도 아쉬운 실정이다.

전시행정을 지양하고 중견, 중소업체의 고충해소에 관심을 집중하는 실리적인 정책변화가 없는 한 반도체와 같은 첨단업종의 경기사이클에 산업 주무부서가 끌려다니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앞으로도 되풀이될 것이라는 사실을직시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