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18)

엘리베이터 안에도 사람은 없었다.

사내는 천천히 맨 위층의 버튼을 눌렀다. 맨 위층까지 오르는 동안 엘리베이터는 정지되지 않았다.

20층. 사내는 열린 엘리베이터의 문으로 여유 있게 내려섰다. 그리고 좌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통로의 맨 끝. 2020호실이었다.

2020호실 앞에 선 사내는 자연스럽게 키 버튼을 눌렀다. 다섯 자리 숫자였다. 사내는 잠시 망설였다. 어떤 음악을 울리게 할 것인가. 사내는 마지막으로 7번을 눌렀다.

철컥,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음악이 흘러나왔다. 재즈였다. 이미 키 버튼을 누르면서 선택된 음악이었다.

내부는 여성의 방처럼 잘 꾸며져 있었다. 사내는 창으로 다가서 창 밖으로드리워진 안테나를 접어들었다. 매캐한 연기가 창문으로 밀려 들어왔다. 광화문 네거리와 종로 쪽, 무교동 쪽과 시청 쪽의 도로에서 연기가 솟구치는것이 보였다. 종합청사와 경복궁 부근에서도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천천히 컴퓨터 앞으로 다가선 사내는 창 밖으로 걸려져 있던 안테나를 컴퓨터 옆에 놓았다. 컴퓨터의 모니터에 「OFF LINE」 이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사내는 뒤 주머니에 들어 있는 리모컨을 꺼냈다. 털썩. 사내는 컴퓨터반대편에 놓여 있는 침대에 털썩, 소리가 나도록 드러누운 후 리모컨을 조작했다. 압축되었던 데이터들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다시 리모컨의 버튼 하나를 누르자 옆에 놓여져 있는 프린터에서 화면의 내용이 인쇄되기 시작했다.

카산드라 윌슨의 무거운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 오는 사이렌 소리와 어우러졌다. 사내는 잠시 눈을 감았다. 매캐한 냄새, 열린 창으로 연기가 밀려 들어왔다.

인쇄 출력은 잠깐이었다. 대부분 숫자로 표기되어 있는 인쇄물을 확인한사내는 다시 리모컨을 조작했다. 창문 바로 옆 배수관에 절묘하게 뚫려 있는구멍을 통하여 아래로 내려진 케이블이 끌어올려지면서 자동으로 감겼다. 굵지 않은 케이블이었지만 한참 길었다.

케이블이 다 감기자 사내는 컴퓨터와 케이블을 연결하기 위해 설치한 단자판에서 케이블을 제거하고 컴퓨터와 연결된 단자도 제거했다.

사내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치솟는 연기로 아래가 잘 보이지 않았다.

재즈, 카산드라 윌슨의 음악과 사이렌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