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29)

맨 홀 김 영 근 제1부 통신대란(通信大亂)

사내가 리모콘을 조작하자 화면의 종로 쪽 상황이 차츰 차츰 아래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가 아래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었다

리모콘에 18층이 표시되자 사내는 1820호실의 여자를 생각했다. 오겠지. 오늘도 오겠지. 오늘은 빨간 하이힐을 신고 말간 핏빛 와인 한 병을 들고 오겠지. 머리 끈을 풀고 긴 머리칼을 흩날리겠지. 그리고...

17. 16. 15. 14. 13.

리모콘을 조작할 때마다 더욱 짙어지는 연기가 화면에 나타났다. 사이렌 소리 계속 이어지고 「죽음의 편지」도 계속 흘러나왔다.

「쉿. 나는 그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고 생각했어요.

그 소리는 그렇게 크지 않았어요. 그 목소리는 미묘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쉬잇!」 사내는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르며 리모콘을 조작하여 카메라의 위치를 계속 아래로 내렸다.

12. 11. 9. 8. 7.

화면에는 동아일보사 앞 환풍구에 물을 쏘아 대는 소방관들의 모습이 자세하게 보였다. 소방 호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를 피해 솟아오르는 연기가 주변 플라타너스 가지와 잎을 요란스럽게 흔들어 대고 있었다.

이순신장군 동상. 일렬로 늘어선 은행나무. 화면은 세종문화회관 쪽 풍경으로 천천히 이동하고 있었다.

길 건너 세종문화회관 쪽 지하도 입구가 화면에 나타났고, 지하도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공중전화 박스. 다시 사내가 리모콘을 조작하자 지하도 입구에 열 지어 세워져 있는 공중전화 박스가 화면에 나타났다. 사내의 손놀림에 따라 그 공중전화 박스가 크게 비쳐졌다. 지하도 입구에서 솟아오르는 연기가 화면을 가리곤 했지만 박스 내부의 전화기까지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내는 화면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전화박스로 드나들고 있었지만 오래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모든 전화가 고장이 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