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 미국의 압력

지난 6월 미국 상무장관인 미키 캔터가 서울에 다녀갔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대표로 한국시장을 여는 데 앞장섰던 그가 이제 상무장관의 자격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해 시장개방을 촉구하고 위세당당하게 돌아갔다. 특히 통신시장의 개방을 강력히 요구하고 신규 통신서비스업체를 방문해 미국산 장비의 구입을 요청하는 등 우리나라를 한바탕 휘저어 놓았다.

그가 방문하기 한 달 전 서울에서 열린 韓, 美 통신협상에서 USTR 부대표가 한국의 통신시장 개방정도에 대해 강력하게 불만을 표시했다. 그들이 요구하는 절대적 상호평등은 논리적으로 상당히 옳은 것이지만 그것은 마치 체급경기인 복싱에서 체중을 무시하고 헤비급과 라이트급이 한 링에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국이 시장을 완전히 개방했다고 해서 AT&T, 모토롤러 등 세계적인 통신업체들이 가득한 그곳에 다른 나라가 진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며, 그렇지 못한 여타의 국가들은 시장을 개방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완전히 항복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결국 그들의 완전개방과 우리 정부가 98년부터 외국인 투자지분을 33%까지 허용한 것 중 어느 것이 더 파격적인가는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7월에는 USTR가 우리나라를 통신분야 우선협상대상국(PFC)으로 지정해 민간통신사업자의 통신장비 구매시 미국업체에 대한 내국민 대우보장과 통신서비스 시장개방을 요구했으며, 우리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 차원에서 협상할 일이지 양방간의 양자협상 대상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측은 협상에 응하지 않거나 결렬되면 강력한 보복관세를 매기겠다는 강경한 태도였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제상황에서 반도체나 자동차 등에 보복관세를 맞고 우리가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상은 불과 3개월 동안에 우리에게 일어났던 일들이다. 계속된 강대국의 요구에 우리 정부는 EU에 정통부 협상팀을 급파하는 것과 국내 통신서비스업체 장비입찰에 정부 차원의 구매보증 요구에 맞서 공정한 경쟁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그들과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통신기기 무역은 지난해 약 4억5천만달러의 흑자를 기록했으나 미국과는 2억2천만달러의 적자를 나타냈다. 미국에서의 통신기기 수입은 연간 40%씩 증가, 현재 국내시장에서 미국 제품이 차지하는 비율이 2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규 통신사업자들의 장비수요가 늘어나는 2000년까지는 35∼40% 정도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됐다.

이렇게 긴박하게 변화하는 시장환경에서 우리 스스로 시장을 지킨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내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우리도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먼저 우리가 그들의 시장개방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기술력의 확보가 우선돼야 한다. 현재 우리가 CDMA 공동개발에서 이뤄낸 성과를 바탕으로 신규 통신서비스에 필요한 HW와 SW의 개발을 정부와 업계가 공동으로 추진하는 것과 향후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에 필요한 ATM 교환기술과 위성이동통신기술 등에 대한 개발을 아울러 진행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서비스 사업자는 고객 위주의 철저한 서비스체제를 구축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애국심을 빌미로 국내 소비자를 잡던 시대는 지났다. 고객의 기호에 맞는 철저한 서비스체제의 구축만이 그들을 잡는 유일한 방법이다. 고객을 최우선으로 하는 구미 각국의 서비스업체들과 경쟁하려면 고객의 기호를 만족케 하는 서비스체제를 갖춰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인력문제로, 통신분야의 전문가를 양성하는 일이다. 우리나라는 바닥이 좁다고들 한다. 그만큼 우수인력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신규 통신서비스업체들이 생겨나면서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인력의 스카우트 문제로 업체간에 다툼이 벌어지는 현실에서 과연 선진업체들과 맞설 경쟁력이 생길 수 있을까 의문시된다. 전문가의 양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정부와 기업이 추진해야 할 과제이다.

마지막으로 USTR를 보면서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강력한 통상정책을 추진할 별도기구의 필요성이 절실한 시점에 온 것 같다. 미국은 지난 62년 USTR를 설립하면서 통상정책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했으며, 88년부터 USTR에 美 의회의 통상협상에 관한 전권을 이양하는 등 위상과 기능을 대폭 강화시켜 슈퍼301조에 관한 협상과 WTO,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창설 등 주요 협상을 도맡아 처리하게 했다. 현재 일부 정부기관 산하에서 진행되는 통상업무에 대해 USTR와 같이 막강한 힘을 갖는 별도의 기구를 설치, 통상정책에 대한 총괄적 권한과 책임을 이양하고 이를 통해 통상전문가를 지속적으로 양성하는 한편 더욱 거세지는 그들의 개방압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이론적 배경과 응축된 힘을 키워야 하겠다.

〈현대전자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