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42)

여기엔 아무도 없어요.

당신과 나밖에는.

약간은 따스한 죽음, 오세요.

약간은 따스한 죽음을 맛보아요.

오늘밤 나와 함께.

사내가 재즈를 좋아하게 된 것은 전문적으로 컴퓨터 프로그램을 공부하면서 부터였다.

당시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각광을 받지 못할 때였다. 마찬가지로 재즈도 요즈음에 와서야 예술로서 제대접을 받기 시작했지 그 전에야 빈민들의 위로물일 뿐이었다.

여러 성행위 가운데서도 흑인 남녀의 교합이 유독 자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사내는 여러 번 가졌으나 결국 재즈를 통해 그 힌트를 얻었다.

재즈는 미국의 주류계층인 백인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음악이었다. 주인과 노예의 개념이 도덕적으로나 사화적으로 정당시되던 시대에 노예의 위치에 섰던 흑인에게 주어진 유일한 자유는 바로 섹스였다.

노예를 소유하던 백인들에게도 흑인노예들의 섹스는 자손번식을 위한 지극히 동물적인 행위에 불과했고, 줄이은 이세의 탄생은 곧 상품의 대량생산으로서 재산증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살아움직이는 생물체는 물론 무생물은 마냥 억압하다 보면 언젠간 폭발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녔다. 그 폭발의 순간이 유보되면 유보될수록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한 바늘구멍만한 통풍구라도 만들어 자유를 호흡하게 해야 했다.

흑인들에게 섹스는 구멍이었다. 그 구멍은 자유.

그 속에서 그들은 재즈를 불렀다. 섹스와 재즈가 폭발을 방지할 수 있는 통풍구 역할을 훌륭히 해낸 것이다.

억압될 대로 억압된 존재에너지가 하나로 집결되어 자유라는 이름으로 표출되는 섹스는 다이내믹할 수밖에 없었다.

셀로니어스 몽크가 「재즈는 자유다」라고 말한 이유중 하나가 아닐까.

어쨌든 흑인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던 재즈가 눈에 보이는 속박은 없어도 유달리 자유를 갈망하는 이 시대의 예술로 다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재즈는 든든한 과거와 흥미진진한 미래를 내장한 현재시제로 된 신선하고 중요한 예술이다」라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말이 사내에겐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