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정보기술협정 체결

「정보기술협정(ITA)」이 아태경제협력체(APEC)의 필리핀 선언으로 가시화하고 있다. 최근 필리핀에서 열린 APEC회의는 미국의 강력한 요구로 「오는 2000년까지 컴퓨터 및 관련 제품들에 대한 관세를 실질적으로 제거한다」는 ITA를 추인했다. 특히 후발 개도국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번 APEC 선언은 다음달 9일 싱가포르에서 열릴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담에서 미국이 ITA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확실한 근거로 제시할 전망이어서 이의 체결이 거의 확실시 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ITA는 아직까지 국제경쟁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국내 정보통신업계를 강타할 강력한 태풍으로 등장, 이행기간 연장 품목과 무관세화 품목 등 협상카드 마련에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됐다.

ITA는 2000년까지 컴퓨터 하드웨어, 통신장비, 반도체 등 미래 정보산업을 좌우하는 2백여개 정보기술제품의 관세를 철폐하자는 것으로 반도체 등 극히 일부 품목을 제외하곤 경쟁력이 취약한 한국으로서는 간단히 무시할 수 없는 협정이다.

물론 ITA가 장기적으로 우리의 경쟁력 강화에 도움을 주고 회원간 교역확대를 통해 국부를 높인다는 정부의 논거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취약한 우리의 정보통신산업이 「개방과 경쟁」이란 높은 파고를 이겨내면서 실질적인 자립기반을 갖추기에는 2000년까지의 이행기간이 너무 짧은 게 사실이다.

미국, EU, 일본, 호주, 싱가포르 등 28개국의 참여가 예상되는 이 협정이 체결되면 2000년까지 4단계에 걸쳐 컴퓨터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반도체통신기기 등 4개분야 180개 품목의 관세가 완전 철폐될 전망이다.

정부가 국내산업 보호를 위해 고심 중인 정보기술협정 가입을 전제로 한 협상카드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국내산업에 미치는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무관세화 품목을 가능한 한 줄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행기간을 연장하는 것이다. 오는 2004년까지 이행기간의 연장을 관철하고 정보기술의 범위를 엄격히 적용하는 것이 정부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카드일 가능성이 높다.

이같은 협상안에 전제한다면 경쟁력 우위에 있는 반도체 관련 16개 품목과 국내 정보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SW, HS 미분류 품목 등은 영순위로 제시될 것이 거의 확실시 되며 10개 품목의 컴퓨터와 통신장비, 반도체 제조장비 등은 이행기간 연장품목으로 분류될 전망이다. 특히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는 계측기기와 10여개 일반 전자부품 등은 제외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이같은 우리의 무관세화 품목과 이행기간 연장 등의 협상안을 「쿼드」 4개국이 그대로 수용하겠느냐는 데 있다. 쿼드 4개국이 우리의 입장을 이해해줄 리 만무다. 우리나라는 내년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회원국으로 정식 가입해 후발 개도국들에 주어지는 혜택을 누리기도 힌층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품목별 유보는 논리적으로 취약하므로 이행기간 연장등에 주안점을 둬 협상카드를 완성하되 이행기간 연장을 정보기술의 급속한 진보를 감안, 2004년까지의 연장을 포함한 단일안으로 마련돼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어 갈수록 협상폭이 좁아지고 있는 형편이다.

이제는 ITA 자체를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데는 정부나 업계가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무관세와 품목의 선정과 이행기간 연장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물론 현재 무세화 대상품목으로 거론되고 있는 소프트웨어나 반도체 같은 품목은 이미 무세화를 실시하고 있거나 지난번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시 5년 안에 무세화를 실시키로 양허한 바 있어 ITA에 참여할 경우 오히려 수출증대가 기대되는 등 유리한 면도 없지 않다.

우리로서는 정보기기 관세철폐에 따르는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정보통신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최선이다. 정부는 빠른 시일내에 관련업계의 의견을 수렴해 최종 입장을 정리하고 이에 따른 대응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