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시장 개방을 1년여 앞둔 유럽 각국의 대비책이 구체화하고 있다.
유럽지역 통신시장 규모는 미주에 이어 세계 2위. 이를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통계도 많다. 세계 10대 전화서비스 수요국 가운데 1위인 미국, 4위 캐나다, 8위 홍콩, 9위인 일본을 제외하고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등 6개국이 차례로 10위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또한 인구 1인당 전화수요 10대국에서 스위스가 1위를 차지하는 등 10위까지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독일 등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유럽시장이 이론적으로는 98년 1월1일 열린다. 이에 따라 각 유럽연합(EU) 회원국은 물론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역내업체의 경우 시장개방을 경쟁력 강화의 전기로 삼기에 주력하면서 세계시장에서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다른 지역업체들, 특히 미국업체들은 개방되는 유럽을 향해 시위를 겨누고 있다. 이처럼 98년이 되면 세계는 유럽을 정점으로 통신대전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유럽 각국의 개방일정이 일률적으로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국가들이 98년에는 문을 열기 시작하겠다는 것이지 전면적으로 열어 제치겠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 다섯번째로 큰 시장인 스페인의 경우 98년 후반기에 시장개방을 시작, 오는 2003년에 완전히 개방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일랜드도 2000년, 그리스와 포르투갈은 2003년이 돼야 개방할 예정이다.
유럽 각국은 개방에 따른 대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시장은 개방하되 이를 반드시 경쟁력 제고와 연결시키겠다는 것이다. 현재 유럽에서는 영국과 스웨덴이 개방 면에서 가장 잘 돼있다. 이들은 수년동안 경쟁력 제고와 규제 사이의 균형을 조심스럽게 유지해왔고 이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노하우도 축적했다. 이밖에 민영화를 서두르는 대표적인 국가로는 독일, 프랑스, 스위스가 있고 러시아,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도 있다. 또한 그리스나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부분 민영화한 상태에서 완전 민영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이들 가운데 서유럽국가는 주로 자국업체의 사업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한편으로 규제를 완화해 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규제를 만들어가는 추세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개방은 하되 기준을 세우겠다는 것이다. 이들이 규제를 고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외국 업체에 사랑방은 몰라도 안방까지 내줄 수는 없다는 데 있다. 이에 따라 아무리 서비스요금 인하경쟁이 치열해진다 하더라도 모든 통신서비스의 재원이 되는 기본전화서비스는 국가의 결정폭이 넓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외국업체들의 시장진입을 허용한다 해도 자국업체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는 마련돼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더구나 유럽 각국 정부는 미래 정보고속도로에서 예상되는 새로운 서비스를 위한 공정경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EU는 통신시장 개방계획을 꾸준히 추진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EU는 개방에 대한 원칙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경제규모가 다른 만큼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긴 하지만 개방을 코앞에 둔 현재까지 각국의 전화요금조차 통일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측은 이같은 유럽의 상황에 대해 규제를 비롯한 각종 원칙수립 움직임이 너무 더디다고 불평한다.
그뿐만 아니라 일부를 제외한 유럽 각국 정부도 아직까지 규제와 경쟁에 관한 명확한 원칙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EU가 업체를 모두 동일선상에 갖다 놓고 출발신호를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컨대 독일의 경우 세계 3위의 매출을 자랑하는 도이치텔레콤(DT)에 의해 독점되고 있다. 국영 DT는 부채의 청산 및 경쟁력 향상이 매우 시급한 상태로, 최근 들어 뉴욕을 비롯한 국제 증권시장에 주식을 상장하는 등 민영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공모주에 비해 입찰주문이 5배 이상에 달해 2백억마르크라는 재원을 마련하는 등 민영화 첫단계는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초기거품이 제거되고 나면 높은 채무 등 부실구조가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해외시장에 대한 진출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에 걸친 네트워크를 가진 페바, 피아그, RWE 등 자국 전력업체를 비롯한 외국업체의 참여가 분명한 상황에서 DT의 앞길은 가시밭길이 될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이탈리아도 정부가 국영 통신업체인 스텟의 지분매각에 대해 방침을 세우지 못하는 등 구체적인 규제의 틀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막연하게 스텟의 주식매각은 내년 초에 이뤄질 것이라고만 밝히고 있다.
한편 유럽시장에서 한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이익을 좇는 각국 업체간의 연합이다. 역내업체인 DT, 프랑스텔레콤(FT)과 미국 스프린트간 3각편대인 「글로벌원」이 세계시장 정복 일단계로 유럽시장을 공략하고 있고 미국 AT&T가 유럽업체의 연합인 유니소스와 제휴, 이 지역시장을 파고들고 있다.
이같은 연합움직임은 특히 최근 들어 영국시장에서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브리티시텔레컴(BT)과 미국 MCI커뮤니케이션스가 합병을 발표했고 이에 대해 글로벌원은 영국 케이블 앤드 와이어리스(C&W)와의 제휴로 응수했다. 글로벌원은 C&W를 불러들여 유럽에서의 기반을 확실히 해두고 이 회사가 갖고 있는 아시아 등 기타지역에서의 사업체계를 활용할 계획이다. 이어 영국정부가 전화시장 개방을 발표하는 등 영국 통신시장은 현재 가장 숨가쁘게 변화하고 있다.
이처럼 유럽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제휴는 국경을 초월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는 업체에 국적보다 우선하는 것은 「돈」이라는 것을 드러내주고 있다. 현재로선 제휴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유럽업체간에만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이는 이익을 찾아 곧바로 아시아, 중남미 등 여타 대륙으로 번져나갈 기세다. 이런 점에서 세계 통신시장은 하나로 엮여 있고 이것이 바로 유럽시장의 변동이 세계업계의 주목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허의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