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25)

신설 회사인 데이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스스로 벌어 운영해 나갈 수 있는 자활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데이터통신사업은 돈벌이가 되는 사업이 아니었다. 하나의 사업으로 출발하기에는 수요가 너무 적었고, 또 앞으로 몇년 사이에 갑자기 늘어날 전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회사를 설립한 것은 시대의 흐름인 데이터통신을 보급함으로써 정보화사회를 앞당겨야 한다는 국가적 필요성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정보화사회의 기반을 구축하자는 뜻에서 이 회사를 발족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데이콤의 자활책은 국가에서 제시해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한 수익사업의 일환으로 마련된 것이 특정통신회선사업이었다.

한국통신에서 운용하고 있는 선로의 하나인 특정통신회선은 컴퓨터와 컴퓨터, 컴퓨터와 단말기, 또는 단말기와 단말기 사이에 교환설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연결하여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전기통신회선으로 흔히 온라인회선 또는 데이터전용회선이라 한다.

일반 전화선은 가입자 단독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인데 비해, 전용회선은 가입자가 단독으로 사용하는 것으로서 은행의 본점과 지점, 기업의 본사와 공장 등사용자가 희망하는 두 지점 사이를 직접 연결하여 컴퓨터와 컴퓨터간에 데이터를 주고 받게 된다. 때문에 전용회선의 사용료는 정액제로서 일반 전화요금에 비해 매우 비쌌는데, 이러한 전용회선을 한국통신으로부터 인수받아 데이콤의 수익사업으로 운영케 했다.

신설된 데이콤의 수익사업으로 특정통신회선사업을 끌어들인 것은 데이콤 설립 실무전담반의 아이디어였다. 애초에 실무전담반이 데이콤의 그럴듯한 자활책으로 내놓은 방안은 특정통신회선사업과 텔렉스사업 두가지였다. 그들은 실제로 전용회선사업의 운영을 전제로 하여 82년부터 10년 동안의 데이콤의 운영 수지를 전망한 자료를 말들어, 이를 첨부한 데이터통신 전담회사설립안을 작성한 다음 81년 11월 전대통령에게까지 보고했다.

그러나 데이콤이 설립되고 나자 모든 사업계획이 재검토되었다. 전담반이 작성한 설립안은 회사가 설립되고 나서 6년 동안은 계속적자를 내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전제는 새로 발족한 데이콤의 경영진이 받아들이기도 어렵거니와 82년 1월에 신설된 체신부 통신정책실 실무자들의 구미에도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데이콤의 수익사업으로 가장 적합한 사업이 무엇이냐는 문제를 재검토했는데, 역시 데이콤의 적자를 보전할 수 있는 사업은 특정통신회선사업이나 텍렉스사업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특정통신회선사업의 이관에 대해 신설된 한국통신측에서 완강히 반대했다. 그들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반대 이유는 공중전기통신사업은 한국통신만이 경영할 수 있다는 전기통신법의 규정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익성 있고 장래성있는 고유사업을 아무런 통신설비도 갖추지 못한 신설회사에 넘겨줘야 한다는데 대한 반감이 컸다. 특히 데이터통신에 대한 이해가 깊고 그것을 한국통신 고유사업으로 치부하고 있는 간부일수록 반대가 심했다. 신설

된한국통신의 계획국장으로서 특정통신회선사업 이관에 가장 완강히 반대했던 이응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용회선사업이란 회선 대여사업으로 자기 회선을 가진 사업자가 그 회선을 빌려주는 것이 원칙인데, 데이콤은 한국통신의 회선을 가지고 영업만 하면서 영업비용으로 전용회선 사용료의 50%를 받았어요. 그러면서도 회선의 시설이나 유지 보수는 한국통신이 책임지고 있었죠.

그러니까 특혜도 보통 특혜가아닌 겁니다. 한 마디로 땅 짚고 헤엄칠 수 있게 만들어 준 거죠"특정통신회선사업의 이관에 대해 반대한 것은 한국통신 간부들만이 아니었다. 데이콤 설립추진위원으로서 데이콤 설립작업에 있어 이론적인 뒷받침을 한바 있던 전기통신연구소 책임연구원 이원웅도 그 아이디어에 대해 처음부터반대했다.

"전용회선을 반값에 갖다 배를 남기고 판다는 것은 순전히 돈을 남기겠다는 목적 외에는 아무런 타당성이 없는 겁니다. 돈이 필요하니까 이런 편법을 씁니다 하는 얘기밖에 안되는 거죠. 그러나 그것까지도 좋다고 칩시다. 그런 편한 장사를 시켜 놓으면 신설 회사가 일을 안합니다. 따라서 어차피 데이터통신이 발전하면 텔렉스사업은 죽게 돼 있으니까 텔렉스사업을 넘겨 줘야 했던 겁니다. 텔렉스사업이 죽고 데이터통신 본업도 살리지 못하면 회사운영이 안될테니까 본업은 살리게 될겁니다. 그렇게 해서 밸런스를 맞춰 줘야 했던거죠"

한국통신의 반발이 거세자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텔렉스사업이었다. 텔렉스는 부호급 통신으로 국제 데이터뱅크와의 연결이 용이하며, 수입 규모가 크기 때문에 데이콤의 적자 보전책이 될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또 앞으로 데이터통신이 발달하면 텔렉스사업은 사양사업이 될 것이므로 한국통신에서도 시원스럽게 고물 처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런데 텔렉스사업의 이관에 대해서도 한국통신이 반대했다. 텔렉스의 수요가 한창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어 전용회선사업 수입을 훨씬 능가하고 있는데다 최신 전자식 교환기인 지멘스의 EDS를 도입, 개통해 놓고 있는 실정이어서 텔렉스사업에 대한 미련을 떨쳐 버리기 어려웠다.

뾰족한 방안이 마련되지 않자 오명 차관은 체신부 예산으로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케 했으나 데이콤측이 반대했다. 데이콤측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일시적인 지원이 아니라 상당한 수입이 보장되는 영속성있는 사업이며, 그러한 취지에서 볼 때 가장 적합한 사업은 특정통신회선사업이었다.

양자간의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되자 체신부가 중재자로 나서, 현행법상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데이콤이 특정통신회선 업무를 위탁받아 대행하되 앞으로 전기통신법을 개정한 다음 이 사업을 데이콤에 이관하기로 했다. 그리고 지사도 없는 데이콤의 현실적인 능력을 감안하여 취급 지역을 1차로 서울에 국한하기로 했다.

이러한 전제하에 한국통신과 데이콤 양사의 실무자들이 모인 실무협의회가 체신부 실무자들이 입회한 가운데 체신부 회의식에서 개최되었다. 3회에 걸쳐 개최된 그 회의에서는 특정통신회선설비의 유지.보수는 누가 맡으며, 두회사 사이의 회선 사용 요율은 어느 선으로 정하느냐는 문제가 쟁점으로 대두되었다. 전자의 경우, 앞으로 기술 수준의 향상에 따라 점차적으로 데이콤에 넘겨야 하되 아직은 한국통신에서 현행대로 전담해야 한다는데 쉽게 합의했으나, 후자의 경우 상호간의 이해와 요구가 달라 쉽게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82년 6월 1일 체신부는 "데이터통신 업무 이양"이라는 제목하에 "데이터통신전담회사 설립 목적 달성과 정보통신의 조기육성 발전을 위하여 데이터통신회선(온라인 전용회선) 업무를 아래의 요령에 의거 조기 이양하고 그 결과를 통보하라"는 내용의 문서를 두 회사에 발송하여 양사간의 조속한 타결을 촉구했다. 그 요령이란 첫째, 한국통신과 데이콤간에 협정을 체결하여 시행할 것. 둘째, 한국통신과 데이콤간의 회선 이용 요율은 회사 설립 초기의 적자 보전에 기여할 수 있는 적정선을 선택하여 합의할 것 등이었다.

이와 같은 체신부의 의지가 천명됨에 따라 양사간의 협의는 빠르게 진행되어 그 해 9월 4일 양사의 대표가 "양사간의 특정데이터통신회선 사용업무 취급에 관한 협정서"에 서명을 하게 되었다. 이 협정서에는 양여자인 한국통신사장 이우재와 양수자인 데이콤 사장 이용태는 물론 체신부차관 오명이 입회자로서 먼저 서명했다.

이에 따라 데이콤은 9월 6일부터 서울지역을 대상으로 한국통신의 특정통신회선사업을 위탁받아 운영하게 되었는데, 협정 기간은 82년말까지로 하되 매년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업무의 취급지역은 데이콤의 지방 조직이 구성되는 대로 지방으로 확대할 수 있도록 했다.

특정통신회선사업은 예측했듯이 데이콤이 설립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립 기반을 다지는데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출발 첫해인 82년 데이콤의 총매출액은 3억 7천7백만원이었는데, 그 중 특정통신회선사업 수입은 3억 4천2백만원으로 90%를 차지하여 설립 첫해의 경영 수지를 흑자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비록 첨단 기업이긴 하지만 인위적으로 탄생시킨 데이콤이상당 기간 적자에 허덕일 것이라는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창업 첫해부터 흑자를 냈던 것이다. 이러한 데이콤의 흑자 행진은 이듬해에도 계속됐는데, 총매출액 28억 5백88만원 중 특정통신회선사업 수입이 15억 7천6백만원을 차지함으로써 회사의 주수입원으로 계속 확대돼 나갔다.

그러나 그때까지 데이콤의 특정통신회선사업은 한국통신의 통신회선을 빌려 수요자에게 임대하는 위탁운영에 불과했다. 데이콤은 임대해 줄 전용회선을 갖지도 못했지만, 설령 갖고 있다고 해도 "공중전기통신사업은 한국통신이 이를 경영한다"는 전기통신법의 규정에 묶여 통신사업자로서 직접 경영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83년 12월 30일 전기통신법이 분리되어 전기통신기본법과 공중전기통신사업법이라는 새로운 법이 탄생하면서 한국통신 이외의 통신사업자에게도 공중통신사업자의 자격이 부여되었다. 즉, 새로 제정된 전기통신기본법 제7조 제2항은 "체신부장관은 공중통신사업의 효율적인 경영과 새로운 공중전기통신 역무의 신속한 육성.보급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한국전기통신공사 외의 자를 지정하여 공중통신사업의 일부를 경영하게 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1백여년 동안 지속돼온 공중통신사업 경영의 독점권을 깨뜨렸던 것이다.

이어 이듬해 9월 데이콤은 체신부로부터 새로운 공중통신사업자로 지정받았는데, 이는 공중통신사업자로서의 데이콤의 위상을 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그 동안 중요한 과제가 되어 왔던 특정통신회선사업 인수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었다.

특정통신회선사업의 이관을 위한 한국통신과 데이콤간의 협의 과정에서 가장 심각한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전용회선의 임차료였다. 그것은 데이콤의 사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특히 데이콤으로서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양자간의 합의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자 체신부가 중간에 나서 단안을 내렸다. 84년 12월 31일 체신부는 두 회사에 공문을 보내 85년 1월중에 한국통신은 특정통신회선을 데이콤에 인계하도록 하라는 통보를 하는 한편 회선의 임차료를 명시했는데, 시내회선은 사용료 수입의 1백%를, 시외회선과 국제회선은 50%를 지급하도록 했다. 즉, 데이콤으로 하여금 시내회선 사용료 수입에서는 한푼도 남기지 말고 전액 한국통신에 납부하되, 시외 및 국제회선에서는 수입의 50%를 나누어 갖도록 했다.

"전용회선 설비 제공 대가는 원가로 계산한다고 규정돼 있었지만 원가계산이 제대로 나와야죠. 그래서 50~60%에서 3백%에 이르는 수많은 안이 나왔는데, 양 당사자간에 합의가 안되는 거였어요. 그러자 오명 차관이 시내회선은 1백%, 시외회선은 50%라고 잘라 버렸어요. 양 당사자간에 합의가 안될 때는 체신부장관이 직권 조정을 하게 되어 있었거든요. 그렇게 해서 가장 큰 난제였던 전용회선 임차료 문제가 해결됐죠"

데이콤의 기획관리실장으로 특정통신회선사업의 인수작업을 지휘했던 김대규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