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수년 전 일본의 엔화 가치가 달러당 1백엔에서 80엔대로 돌입하자 일본의 모 증권회사는 전기통신 관련 메이커를 대상으로 얼마의 엔고까지 견딜 수 있는가 조사 발표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대기업들이 80엔대까지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돼 있는데 무라타제작소(村田製作所)는 41엔에서도 이익을 유지하는 기업으로 판명됐다. 무라타는 티탄산바리움의 혁명으로 고도 성장한 세계적인 전자부품 메이커로, 그들이 만들고 있는 고주파용 칩 콘덴서는 세계시장 점유율이 50%이고 세라믹필터와 발진자는 무려 85%에까지 이르고 있다. 또한 그들은 대부분 엔베이스로 수출하기 때문에 엔고에 따르는 환차손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각광을 받고 있는 이동통신기기나 휴대전화에는 무라타의 부품 없이는 제품이 안될 정도로 전세계의 통신기 메이커는 이들과 제휴해 차세대 상품에 필요한 핵심 부품을 선행해 개발하고 있다. 얼마 전 그 회사 사장을 만났을 때 휴대전화를 무라타가 만든다면 가장 경쟁력 있는 제품이 될 것이 아닌가 하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기존의 고객을 경쟁자로 만들면서까지 사업을 확장할 생각이 없다면서 다음의 세 가지만을 주력하겠다고 했다.

그 첫째가 세라믹 관련 제품에서 동업 타사가 좀처럼 따라올 수 없는 제품을 개발하는 일, 둘째는 이것을 제조, 생산하는데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생산설비로는 경쟁력 있는 제품이 안되므로 반드시 생산공정에 필요한 설비를 자체 개발하는 것, 셋째는 공장에 자재가 반입돼 제품이 되고 공장을 떠날 때까지의 기간을 단축시키는 노력, 이 세 가지만을 위해 전력투구할 뿐이라고 말했다.

세라믹제품은 분말의 합성에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고 이것을 소성(燒成)하는 기술축적이 중요한데 이런 기술을 갖추었다고 해도 무라타의 원가경쟁에 이길 수 있는 기업이 없다고 한다. 지금도 무라타는 해외생산기지가 구미를 비롯, 동남아시아 여러 곳에 있으나 그곳의 생산설비는 무라타가 만든 것이고 거기에 필요한 재료 또한 무라타가 만든 분말을 사용하므로 해외공장을 늘릴수록 국내 가동이 바빠진다고 한다.

10수년 전의 일이다. 액정표시장치분야의 다크호스로 등장한 호시덴사는 최근 필립스전자가 그 기술을 탐내 합작회사를 만들었다. 액정표시장치는 전세계 공급을 일본만이 하고 있고 그것도 도시바, 샤프, NEC 등 대기업이 주력인데 호시덴이라는 중소 메이커에 불과한 기업이 그 기술을 확보해 대기업과 어깨를 견주어가고 있다. 호시덴은 오랜동안 소형 기구부품 메이커로, 소형 전자제품에는 역시 이 호시덴의 기구부품을 안쓰는 곳이 없다.

10수년 전 호시덴 사장(作故)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당시 필자가 재직했던 메이커에서 호시덴 부품을 상당량 수입하고 있어 우리와 협력을 요청했으나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이유는 대기업 산하에 들어가면 응석이 생기므로 품질이 다소 떨어지거나 값이 비싸도 사주기 때문에 최고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므로 호시덴은 절대로 대기업과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이 전자산업을 시작할 때 대부분의 대기업이 부품과 함께 완제품사업을 했으나 오늘날 대기업은 부품산업에서 거의 손을 들었다. 오직 마쓰시타만이 부품사업을 계속하고 있는데 마쓰시타는 워낙 사업부제가 강해 타 회사나 다름없이 가격과 품질을 유지하면서 부품생산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세계시장 점유율이 높은 일본의 유명한 부품메이커는 대기업그룹이 아니고 전부 중기업형 기업들이다. 무라타를 위시해 교세라, TDK, 호시덴, 니덱, HOYA, 마부지, 알프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런 현상은 자동차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산업이 경쟁력을 갖는 것은 완제품의 조립산업에 경쟁력이 있어서라기보다 그 제품의 핵심 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들이 전세계시장을 제패할 정도로 경쟁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대기업은 모든 부품도 자기 산하에 두어야 안심이 되고 안정적인 공급이 보장된다고 생각해 대기업 완제품 메이커가 그에 필요한 부품까지 섭렵하고 있는가 하면 중소기업은 대기업 산하에 들어가면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한 업종에서 크게 성공했을 때 그것을 통해 세계시장에서 명성을 얻기보다 확대전략으로 몸집을 키우는 데 더 혈안이 돼 있다. 여기에는 정부의 지원책이나 금융의 혜택이 매출과 연관된 탓도 있다.

세계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을 지배하는 인텔의 그로브 사장이 갈파한 패러노이아(偏執狂)만이 비즈니스 세계에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탁견을 음미해야 하겠다.

<한솔PCS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