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시장을 공략하라」
독일의 한 중견 텔리비전 제조회사가 남들이 잘 파고 들지 않는 시베리아의 전자시장만을 전략적으로 공략, 이 지역에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는 소식이다. 텔레비전과 오디오 및 비디오제품, 위성튜너, 안테나, 전화기 등을 생산하는 독일의 그룬디히사는 러시아의 여러 지역 가운데 시베리아를 집중 공략하겠다는 포부를 일찌감치 정하고 의욕적으로 이 지역에 파고들어 시베리아의 소비자에게 「최고의 제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기업은 시베리아의 바이칼호수를 끼고 있는 고도 이르쿠츠크시와 서부 시베리아의 중심 도시인 노보시비르스크에 최근 판매사무소를 연 데 이어 얼마 전에는 시베리아의 오래된 공업도시이자 교육도시인 옴스크시에 아예 판매위탁창고를 마련, 시베리아에 사는 사람이면 이제 그룬디히 텔레비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다.
독일의 이 중견 가전회사가 현재 러시아의 가전시장 전체에서 차지하는 시장점유율은 7∼8%이다. 그러나 시베리아에서는 30%를 웃돌고 있으며, 올해는 신장세가 두욱 뚜렷할 것으로 시장조사기관들은 전망한다.
그룬디히사가 유독 시베리아시장에서 의욕을 보이는 것은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같은 대도시에서는 일본의 소니나 미쓰시타 혹은 네덜란드의 필립스 등 대메이커와 경쟁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다.
지난 94년 러시아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이 회사는 이런 판단 아래 아직 전자제품이 일반화되지 않은 러시아의 오지 가운데 자사가 전략적으로 판촉활동을 벌일 지역을 고르다가 전자제품에 대한 잠재수요가 많고 판매지역이 비교적 넓은 시베리아를 적격지로 정하고, 지난해부터 이곳에서 대대적인 판매공세를 펴고 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이곳 시베리아의 전자유통가는 그룬디히 제품을 97년 시베리아 가전시장에서 「소비자들에게 가칭 호평받을 제품」으로 주저하지 않고 꼽고 있다.
이 기업의 노보시비르스크 사무소의 알렉산드르 레비제프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베리아지역에 공식적인 딜러가 없었고 무엇보다 지방에서 제품을 어떻게 팔겠다는 지역판매정책이 수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으나, 지금은 시베리아의 전자시장이 성숙했고 우리 회사도 상당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전했다.
그룬디히가 시베리아에서 좋은 성과를 올리는 까닭은 색다른 딜러정책에 있다고 업자들은 말한다. 즉 소니와 마쓰시타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형 전자업체들은 모스크바의 이름 있는 현지판매법인을 시켜 시베리아시장에 진출해있다. 그룬디히사도 시베리아를 집중적으로 공략하겠다는 전략이 서기 전에는 이같은 전략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지 사정에 어둡고 지방시장의 특수성을 잘 알지 못하는 중앙의 딜러들은 시장을 속속들이 파고들 수가 없고, 이 때문에 판매실적이 어느 회사를 가릴 것없이 저조한 형편이다.
한편 그룬디히사는 낮은 지명도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딜러를 키우는 특별한 전략으로 이곳 시베리아에서 최고의 기업이라는 평가를 누리고 있다. 이 회사는 시베리아 현지의 작은 딜러들에게 자신있게 영업을 할 수 있도록 각종 혜택을 주는 대신에 도매상을 중심으로 할당량을 지정해주고 엄격한 의무이행을 요구하고 있다. 한 마디로 「전략적으로는 유연하게, 전술적으로는 엄격하게」가 그룬디히사가 시베리아에서 내건 슬로건이다. 이것이 일본 기업들처럼 비싼 비용을 치르고 대대적인 광고를 하지 않고도 이 독일기업이 시베리아에서 성공을 거두는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그룬디히가 시베리아에서 거두는 기쁨 뒤에는 어려움도 몇 가지 있다. 우선 유럽의 가전시장이 여전히 회복기미를 보이지 않아 정가 제품이 아닌 그룬디히 상표를 붙힌 이른바 「회색」의 덤핑제품이 서유럽과 동남아시아에서 시베리아의 텔레비전 유통시장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점이다. 독일산 그룬디히 텔레비전이라고 되어 있으나 완전히 가짜인 위조 제품도 상당수 있다. 이들 위조 제품들은 인도나 중국에서 몰래 만들어 시베리아로 반입되는 것으로 제조날짜와 독일산이라는 마크가 선명해 전문가들도 감식해내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아무리 회색 제품이나 위조품이 판을 친다고 해도 시베리아 현지의 딜러들을 장악하고 있으면 커다란 타격은 없을 것이라고 이 회사는 전망하고 있다. 그룬디히 텔레비전을 찾는 소비자들은 겨냥해 가격덤핑과 제품위조가 성행하지만, 모스크바의 그룬디히 대표부는 이같은 전망아래 △시베리아지역의 딜러망을 더 확충해서 협력관계를 내부적으로 더 다져 나가고 판매창고를 전체 시베리아지역으로 확대하며 △서비스망을 신설해 나간다는 3단계 전략을 오히려 추진하고 있다.
그룬디히 가전제품이 자사 계획대로 광활한 시베리아지역을 장악해 버리고 나면 일본산이나 네덜란드산 텔레비전은 물론이고 최근 러시아의 중저가 가전시장에서 상당한 신장세를 보이고 있는 한국산 텔레비전들도 시베리아 수요자들로부터 외면당할 시절이 올지 모를 일이다.
<모스크바=김종헌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