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전자공업단지인 질레노그라드 지역의 반도체산업이 활력을 되찾고 동남아로의 수출이 호조를 보임에 따라 러시아 반도체산업이 오랜 불황을 딛고 재기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말을 고비로 재생의 기미를 보이던 러시아 반도체산업이 중저가 보급제품의 생산과 수출이 올초부터 활발해지면서 침체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재기 바람은 질레노그라드市 지역의 두 반도체 생산지역인 미크론, 앙그스트렘 및 벨로루시공화국의 수도인 민스크에 있는 인티그럴이라는 반도체생산단지가 주도하고 있다.
수주악화로 인한 생산량 감소로 거의 문을 닫을 지경이던 질레노그라드의 최대 반도체공장인 앙그스트렘은 러시아정부의 연방전자산업 지원기금의 원조로 지난해말 선폭 1미크론의 반도체칩을 대량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설을 갖추고 올해부터 본격 생산에 돌입했다.
연방전자산업 지원기금의 블라디미르 시모노프 부의장은 『지난해 책정한 1천8백20억 루블의 지원기금 가운데 1천3백80억 루블밖에 지원하지 못한 데다 기금이 예정했던 4백개의 반도체개발 및 생산프로젝트 중 99개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데 그쳤지만 앙그스트렘 지원건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앞으로 3, 4년 안에 러시아의 반도체산업을 본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정부가 앞장서 대단위 반도체생산시설에 투자하고 외자를 유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질레노그라드 전자단지에 함께 위치하고 있는 미크론社도 홍콩의 대규모 업체와 반도체생산을 위한 합작법인을 지난해말 세우고 최근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갔다. 이 합작공장에서는 비슷한 직경의 반도체칩에 고루 쓰이는 범용 모듈을 생산해 주로 값이 비싸지 않으면서 품질은 중간 수준을 웃도는 제품을 요구하는 동남아시장에 수출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미크론社는 프름스트로이은행이나 오넥심은행 같은 산업은행들을 설득해 자금원을 확보하면서 좋은 실적을 올리고 있다.
러시아의 반도체산업은 지난 90년과 91년을 기점으로 종전의 정부 및 공공산업체로부터의 수주량이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생산량이 크게 줄고 생산시설이 노후화되는 추락세를 보여 왔다. 이 때문에 지난 6, 7년 동안 러시아의 반도체 생산업체들은 국내시장을 외국기업에 전부 내주고 세계시장에서도 완전히 소외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러나 95년을 기점으로 러시아정부의 반도체산업지원이 이뤄지고 동남아와 일부 유럽시장에 러시아의 보급형 반도체칩이 수출되기 시작하면서 회생의 조짐을 보였으며, 지난해에는 전년에 비해 생산량이 7%포인트 늘고 수출액이 1천9백만 달러로 성장하는 호조를 보인 것이다. 최근 모스크바를 찾은 미국 뉴욕 투자은행의 로버트 토인비씨는 『러시아의 반도체산업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앞으로 4, 5년이 그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동남아시장에 수출되는 러시아의 반도체칩은 대부분 중국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을 겨냥하고 있으며, 첨단 전자제품이 아닌 전자시계 등 일반생활용품에 장착되고 있다. 러시아의 전자업계는 국방기술의 일부로 발전한 반도체생산기술이 기술력에서 우수하기 때문에 외국자본의 투자가 적절하게 이뤄지면 중저가 칩부문에서 러시아제품이 유럽시장 등 다른 지역의 반도체시장에서도 성공을 거둘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모토롤러社와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 등 반도체분야의 세계적인 대기업들도 모스크바의 대표부를 중심으로 최근 러시아의 이같은 잠재력을 평가 중이라는 소문이다.
그러나 정작 러시아 국내시장에서는 아직은 자국산 반도체가 인기가 없는 실정이다. 외국산 트랜지스터와 외제 전자제품을 선호하는 성향이 지속되고 있고, 특히 중저급의 반도체칩을 대량으로 구입해야 할 러시아 국내의 텔레비전 생산업체들이 만성적인 생산감소에 허덕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업계는 외국자본이 보다 더 유치되고 아울러 군수산업 분야에서 러시아 국내의 반도체 생산시설에 수주가 집중되면 에너지 단가의 계속적인 상승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반도체산업이 기지개를 켤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한편, 반도체를 비롯한 러시아의 전자산업에는 28만명의 산업체 인력과 5만3천명의 연구인력이 종사하고 있으며, 2월 현재 2백59개의 공장이 전자산업 분야에서 가동 중인 것으로 러시아 산업부는 집계하고 있다. 이들 공장에서는 약 2천종의 반도체부품과 각종 반도체재료, 반도체 장비를 생산하고 있다.
<모스크바=김종헌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