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157)

말박만한 좁은 공간.

무릎을 펼 수도 없는 작은 방.

사무실을 일본군에게 빼앗기고 직원 자택의 말박만한 좁은 공간에서 무릎을 펴지도 못하면서 근무를 해야 했던 당시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진기홍 옹은 현실처럼 느낄 수 있었다.

힘.

힘이었다.

나라에 힘이 없으면 온 국민들이 곤욕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진기홍 옹은 요람일기가 쓰여질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힘이었다. 일본은 힘으로 우리나라에 통신시설을 설치, 운영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이미 통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무력으로 통신망을 구축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일본이 통신운영을 시작한 것은 1876년의 병자수호조약 체결 후부터였다. 인천을 비롯한 각 항구의 개항과 더불어 그해 12월 부산에 일본 우편국의 설립되었고, 1884년에는 해저전선을 부산과 일본 사이에 연결하였다. 해저전선의 개설과 함께 부산일본전신국이 설치되었는데, 뒤이어 인천과 원산, 한성 등지에 우편국을 증설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이 끝난 후 일본은 곳곳에 깔려 있던 군용전선으로 통신사업을 불법으로 시작했다. 통신선의 보호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임시 육군전신부(후에 전신대로 고침)와 임시 헌병대를 우리나라 땅에 주둔시켰으며, 외교적으로도 치밀한 조치를 취했다.

1896년 5월 14일.

일본 공사는 러시아 공사 웨베르와 4개 조의 협약을 맺었다. 흔히 「서울각서」라고 불리는 이 협약에서 일본은 통신선 수비병을 철회하는 대신 200명 이내의 헌병과 거류지 보호를 구실로 4개 대(각 200명 이하)의 군대를 주둔시키기로 러시아와 합의하였다. 러시아 역시 이와 동등한 규모의 군대 주둔권을 확보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협상의 결과였다.

1896년 6월 9일에는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한 일본 대표와 러시아 외상 사이에 이른바 「막부 의정서(모스크바 협약)」가 맺어졌다.

그 협약에서 일본은 현재 점유하고 있는 조선 내의 전선을 계속 관리하고 보유할 권리를 가지고, 러시아는 한성으로부터 두만강에 이르는 국경까지 전신선의 가설 권리를 보유하되, 조선 정부에서 설치한 전선을 매입할 능력을 가질 경우에는 매입할 수 있게 한다고 규정하였다.

하지만 당사국인 조선 정부에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