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국산 주전산기 외면 안된다

올해로 10년째를 맞는 국산 주전산기 개발사업이 성패의 기로에 서 있다는 소식이다. 세계무역기구(WTO)체제 출범에 따라 조달시장이 개방돼 외국산 기종과 경쟁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데 일부 수요처에서 국산 기종의 구매를 기피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추세가 이어진다면 국산 주전산기산업이 수요기반을 잃어 사장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정부와 ETRI 및 주전산기 4사가 공동개발해 온 주전산기 개발사업은 3차사업을 거쳐 현재 4차사업을 진행중에 있다. 3차에 걸친 국산 주전산기 개발사업에는 1천억원 이상의 개발비가 투입됐고 4차 개발사업에도 4백억∼5백억원의 개발비가 투입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처럼 막대한 개발비를 투입한 국산 주전산기가 원천기술 부족으로 인한 성능미비라는 이유로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현재 전국에 보급되어 있는 국산 주전산기 1천여대는 주로 정부조달시장, 즉 정부기관 및 정부투자기관에서 구매한 것으로 정책적인 배려 덕분이라는 지적이다.

사실 여부는 불문하고 이제는 이같은 정책적인 배려도 어렵게 되었다. 외국업체들에도 조달시장을 개방할 수밖에 없게 됐기 때문이다. 조달시장을 개방해도 국산 주전산기가 충분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면 별로 문제될 게 없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분석이다.

최근의 한 사례가 이같은 우려를 뒷받침하고 있다. 서울시전자계산소가 국산 주전산기업체의 입찰참여를 사실상 봉쇄한 사건이다. 서울시전자계산소는 자동차관리용 시스템을 새로운 전산시스템으로 교체하면서 구매입찰 참여조건을 고가용성(High Availability)시스템을 6개월 이상 운용한 경험이 있는 업체로 제한한 것이다.

국산주 전산기업계는 주전산기를 지난해 하반기부터 일선 시, 군, 구 및 행정기관에 구축하기 시작해 이제 막 상용단계에 있으므로 6개월 이상의 운용경험을 가진 업체만 입찰에 참여토록 한 이 입찰조건에 맞지 않아 입찰에 참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국산 주전산기업계는 서울시전자계산소의 이같은 입찰조건이 타 수요처로 확산되는 것을 염려하고 있다. 서울시전자계산소의 이번 입찰이 당초 조건대로 진행되는 경우 다른 구매기관들도 이와 비슷한 조건을 내걸지 말란 법이 없고 따라서 국산 주전산기 참여가 배제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10년에 걸쳐 주전산기 개발사업을 진행해 오는 동안 외국산 기종을 능가할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주전산기업체들의 무사주의에 일차 책임을 묻고 싶다. 국산 주전산기는 그동안 여러차례 성능면에서 외국산에 비해 떨어지고 호환성에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지적돼 왔다. 또한 가격도 외국산에 비해 비싸고 지원되는 응용 소프트웨어도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따라서 보다 좋은 제품으로 양질의 대국민서비스를 제공하려는 수요기관의 욕구를 국산 외면이라는 말 한마디로 질책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현단계에서 수천억원을 투입, 개발한 국산 주전산기를 버릴 수는 없다. 국산 주전산기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모색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정보사회에서 중대형 컴퓨터는 국가정책과 안보 등 주요정보를 운영하는 핵심 인프라로 외국산 기종이 이같은 근간을 차지하는 것은 국가정보의 유출이라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정부투자기관, 특히 주전산기업계 모두가 다시 한번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나서야 한다. 정부는 중대형 컴퓨터의 기술자립이라는 측면에서, 정부투자기관은 당장의 사용상 미비함보다 국가 정보산업의 발전측면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산 주전산기개발사들로 정책적인 지원에 기대해오던 관행에서 탈피, 이제 국내시장에서 세계 일류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변화를 인식하고 경쟁력 있는 제품개발에 한층 더 노력하는 자구정신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