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166)

낙엽이 지고 있었다.

부는 바람에 하나둘씩 떨어져 내리는 낙엽.

진기홍 옹은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통신피탈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선배 통신인들의 저항과정을 떠올렸다.

당시의 통신인들은 매우 우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일반인들과는 달리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근무지 부근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칠 만큼 지방의 통신인들도 우수한 인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시 통신인들은 일본의 불법행위에 대해 과감하게 항거하였다. 일선의 전보사 직원은 물론, 중앙에서도 강력한 저항운동을 벌였다. 요람일기를 지은 통신원(현 정보통신부) 체신과장 김철영 등이 주축이 되어 강경하게 항의하였는데, 그동안 일본의 불법행위를 뜻대로 저지할 수 없었던 통신원 총판 민상호는 1904년 2월 16일에 이르러 마침내 그 직을 사임함으로써 일본의 불법에 항거하였다.

1900년 3월 통신원 창설 이래 총판의 자리를 지켜오던 민상호의 사임은 당시 통신인들이 일본의 불법행위에 맞선 항쟁의식이 얼마나 강렬하였는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민상호의 후임으로 1904년 2월 24일에 이하영이 임명되었으나 통신업무의 중요성 때문에 민상호는 복직하게 된다.

일본은 유리한 전세를 바탕으로 1904년 2월 22일, 우리 정부로 하여금 이른바 「한일의정서」에 강제로 조인케 하였는데, 그 이후 전신시설에 있어서의 불법행위는 더욱 가중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통신시설의 선점으로 일본의 전세 및 정세가 러시아보다 더욱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기 때문이었다.

하늘이 맑았다.

맑은 그 하늘에 저녁놀이 아름답게 펼쳐졌다.

진기홍 옹은 이제 인왕산 능선에 끄트머리가 걸린 태양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당시의 정황을 떠올렸다.

2천여명을 동원하여 창원과 진해간에 군용 전선을 독단으로 가설하기 시작한 일본군은 1904년 2월 22일 한성과 평양간의 전화선을 전신선으로 바꾸어 그들이 전용하겠다고 요구했다. 이 요구에 대해 논란을 되풀이했으나 이하영 총판의 취임과 더불어 마침내 응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2월 27일 정부는 양국간의 교의를 돈독히 한다는 명분으로 이를 인준하고 말았다.

러일전쟁 종결 후 곧 돌려달라는 조건을 붙였지만, 그날부터 한성과 개성, 개성과 평양간의 전화는 두절되었다. 평양 시내의 전화교환 업무도 정지되었다. 쓰고 있던 전화선을 일본군들의 군용 전신선으로 내주고 만 것이다.

결국은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