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 체질 패러다임 전환

우리 기업이 기술변화가 별로 없는 성숙산업에서 정부의 보호와 지원하에 저임금으로 국제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었던 시절에는 사업을 적극적으로 다각화하는 문어발식 전략이 상당히 주효했다.

정부의 사업허가만 얻게 되면 그 사업을 전개하는 데 필요한 자금은 특혜금융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필요한 기술은 기술도입이나 모방적 역행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으로 확보하는 데 별 무리가 없었다. 시설도 턴키공장 도입이나 자본재 도입으로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여기에다 비교적 교육을 잘 받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값싼 노동력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시점에서 기술도입이나 모방을 통해 제품을 개발한 경우 어느 정도 규모의 생산체제를 확립하기만 하면 상당 기간 그 제품을 생산해도 어렵지 않게 판매가 가능했다.

그러나 1990년대의 기업환경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근로자는 더 이상 헌신적으로 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산직 임금은 선진국 수준에 이르렀다.

중국이나 인도 및 인도네시아 등 후발개도국들은 우리 인건비의 10분의 1 이하의 수준으로 그동안 우리가 비교우위를 누려왔던 노동집약적 성숙산업 분야에 진입, 그동안 우리가 누려왔던 저임금 바탕의 국제경쟁력을 잠식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기술력이 아직 후진국 수준을 별로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데 비해 선진국들은 앞으로 경쟁자가 될 우리 기업들에게 기술이전을 기피하게 됨에 따라 과거와는 달리 기술획득이 어렵게 됐다.

이제 발상의 전환이 근본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그동안 우리 기업을 성공시켜 왔던 많은 변수들이 이제 와서는 바로 우리 기업의 앞날을 어둡게 만드는 주 요인이 된 것이다.

정부의 지나친 보호와 간섭에서 벗어나야 하고 외국 기술선에의 기대도 버려야 한다. 이제는 다른 기업들이 갖지 못한 우리만의 독특한 핵심능력(Core Competence)을 구축해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국제경쟁력을 키우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게 됐다는 말이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핵심능력이 없는 분야는 과감히 정리해야 하며, 새로운 사업도 핵심능력을 확보할 수 있는 분야에만 한정시켜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당당하게 국제경쟁력을 제고해 신국제경제 질서하에서 생존하고 성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미국의 휴렛패커드사가 그들의 공식적 기업목표에서 『우리는 연구개발능력과 제조능력 및 마케팅 기술을 가지고 있는 분야에서 우리의 진출이 사회에 필요하고 수익적 공헌을 할 수 있다고 판단될 때에만 새로운 영역에 진출한다』고 명시하고 있는 것도 바로 핵심능력을 갖추지 못한 분야에는 진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기업이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환과정에서 풀어나가야 할 심각한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다. 그 중 하나는 그동안 과거의 패러다임하에서 문어발식으로 확장해 놓은 경쟁력 없는, 수많은 사업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 기업들이 그동안 해온 사업에 대한 지나친 향수, 우리나라의 전통적 인간관계 정서, 만만치 않은 노동조합의 반발 등 어려운 여건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패러다임에 의해 벌여놓은, 경쟁력없는 사업들은 조속한 시일내에 과감히 정리돼야 하고 그 자원을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분야에 투자해 핵심능력을 좀더 키워야 할 것이다.

체격은 크지만 체질이 약한 기업은 조그마한 환경변화에도 견디지 못하고 몰락할 수밖에 없다. 비록 체격은 크지 않더라도 체질이 강한 기업은 어떤 환경변화에도 살아남아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체격의 패러다임에서 체질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말이다.

<과학기술정책관리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