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웨어산업의 발전방안을 마련할 때 매번 연구모델로 거론되는 국가가 대만이다. 개미군단이라 불리는 대만업체와 국내업체의 차이점을 분석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현실적이라는 이유에서다.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은 모니터를 제외하고는 대만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있는 품목이 거의 없다. 그 중에서도 주기판이 대만에 열세를 보이고 있는 대표적인 품목이다. 그동안 주기판을 생산해온 국내 중소업체들이 거의 사라진 것만 보아도 경쟁환경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대만산 주기판이 국내 수요의 대부분을 차지해 국산PC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국내 주기판산업을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행정전산망 및 교육전산망에 들어가는 PC의 경우 낙찰업체 대부분이 채산성을 맞추기 위해 대만산 저가 주기판의 채용을 추진하고 있어 앞으로 대만산의 국내시장 점유율은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이처럼 국내 PC업체들이 대만산 주기판을 채용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가격이 싸기 때문이다. 가격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제품의 안정성이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저가부품을 사용할 경우 제품에 하자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 경우 컴퓨터환경의 멀티미디어화와 애플리케이션의 다양화로 시스템 다운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주기판산업은 특성상 개발, 마케팅, 영업, 자재조달 및 의사결정 등 모든 측면에서 신속성이 요구된다. 대만업체들은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신기종, 신기술을 발표한 후 6개월 이내에 동등한 성능의 제품이나 더 좋은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국제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술경쟁력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창업 때부터 세계시장을 겨냥해 마케팅계획을 세워놓고 있다는 대만업체들의 경쟁전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기판에 관한 한 이미 국내 중소기업들은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대만업체들에 치여 자생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국내 주기판산업을 보호해야 할 대기업들이 대량수입에 나서는 것은 그 어떤 명목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국내 PC산업을 장기적인 안목으로 키워나가야 할 대형 PC업체들이 눈앞의 이익만을 노려 대만산 제품을 채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일부 대형 PC업체에서 세계 일류기업의 제품과 비교해도 가격이나 성능면에서 우수한 주기판을 생산하고 있긴 하나 다른 PC업체들이 경쟁업체라는 이유 때문에 채용을 꺼리고 있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와는 별도로 일부 주기판업체들이 대만산과 경쟁하기 위해 수출물량을 기반으로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하고 공정을 단순화한 표준형 제품을 생산해 원가를 절감한다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국내 PC업체들을 대상으로 한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사업 외에 전자상가 등 유통상가를 중심으로 공급을 확대해 나간다는 방침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같은 전략만으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 국산 주기판 채용을 전PC업계로 확산시킬 수 있는 방안이 나와야 한다. 국내 PC업체들이 과연 국산 주기판을 자사PC에 채용하는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다.
국내 주기판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먼저 PC업체들의 협력이 중요하다. PC업체들이 값이 싸다는 이유로 자사PC에 대만산 주기판을 채용하는 기업이기주의에서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또한 주기판업체들도 단순히 경쟁업체 제품이라는 이유로 국산제품을 외면하는 관행에서 한시바삐 벗어나야 한다. 세계화가 결코 국산품을 버리고 값싼 외제부품을 쓰라는 것이 아니다. 장래 시장판도를 생각할 때 국산 경쟁업체의 제품이 값싼 외산제품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은 자기 기업을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넓고 길게 생각하여 전략을 세우고 추진해가는 결단력이 아쉽다.
PC업계는 공존공생의 관점에서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국산 주기판의 채용을 확대해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