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동남아 통화위기가 주는 교훈

최근 태국 바트화의 폭락사태에 이어 필리핀의 페소화도 폭락위기를 맞고 있으며 이같은 통화 급락현상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등 동남아 각국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해서 동남아시아에 진출한 기업들에 비상이 걸렸다.

당장은 동남아 진출기업들에만 긴장되는 사태로 부각되고 있으나 이같은 국가별 중심통화의 급락현상이 동남아 몇개국에만 국한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투기성 자금은 이제 국경에 구애받지 않고 빠르게 전지구적 이동을 한다.세계무역기구(WTO)체제는 이런 핫머니의 이동을 더욱 용이하게 해주었다.

이미 각 지역, 각 국가간 경제적 상호의존도는 매우 높아진 상황이어서 한 지역의 통화위기는 곧 다른 지역으로 확산될 수 있다. 특히 국내 자본구조가 취약, 외자유치로 고속성장을 추구하는 개도국일수록 통화위기가 전이될 가능성은 크다.

이제까지 국내 기업의 해외진출은 주로 개도국을 대상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런 지역적 편중이 당장의 동남아 국가들 사이에 도미노현상으로 번지고 있는 통화위기에 따른 타격을 보다 크게 입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당장 동남아에 투자해놓은 기업들로서는 발등의 불부터 끄는 게 순서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위기를 한걸음 물러서서 백년대계를 위한 시각에서 바라볼 줄도 알아야겠다.

지구상에서 멸절하지 않고 살아남은 종은 상대적으로 분포지역이 넓은 것들이었다는 인류학자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기업의 부지런한 해외진출과 분포지역의 확산을 일종의 본능적 생존노력으로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똑같이 폭넓게 분포돼 있었으면서도 공룡은 멸종했으나 개미는 지구상 가장 오래 살아남은 종 가운데 하나로 아직도 곳곳에 퍼져 있다는 사실을 위기상황을 돌파하는 데 필요한 것은 덩치가 아니라 순발력이라는 사실을 입증한 사례라고 한다면 무리한 접목이라는 비난을 받을는지 모른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가운데 어느 쪽이 순발력이 있을 것인지는 자명하다. 그래서 물론 대기업들도 중소기업의 순발력을 살리기 위한 갖가지 아이디어들을 짜내고 있는 줄 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M&A가 세계 기업들간에 다시 극성을 부리고 있다. 국내에서는 법률적 제약이 있어서 아직 적대적 M&A는 공개적으로 성사되기 어렵지만 대기업들이 마음만 먹으면 쓸만한 기술을 가진 벤처기업 한둘쯤 인수하기는 식은 죽 먹기인 것도 현실이다.

그런데 대기업에 인수된 벤처기업들이 그 후에 제대로 기술개발을 지속해간 예를 적어도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몇몇 독자기술을 지닌 벤처기업들이 대기업에 흡수되고 나면 그냥 맥없이 주저앉아버리는 것이다.

최근의 일반화된 기업경영 추세가 M&A를 통한 제품라인의 수직계열화와 전략기지를 전지구적으로 분산시키는 글로벌 경영으로 나아가는 것도 다 기업이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라면 이미 생존에 성공한 종과 실패한 종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눈여겨 보는 자세는 큰 보탬이 될 것이다.

또한 현재 동남아 각국의 통화위기같은 현상이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불거져 나온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것도 현상을 타개하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긴요한 수단이 될 것이다. 이미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통화위기를 예견하고 다소 극단적으로 보이기는 하나 2000년 전후에 세계적 대공황이 나타날 것이라고 전망하는 일군의 경제학자들도 있다는 점 또한 기억하며 발등의 불끄기 못잖게 추세를 한발 물러나 객관적으로 보고 흐름을 앞서 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까지 세계적 추세를 뒤아가기에 너무 급급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볼 때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