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산업 경기에 큰 영향을 미치는 반도체 시황이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최근 미국 반도체업계는 뚜렸한 경기회복기조에 함박웃음을 띠고 있는 반면 한국과 일본 중심의 아시아업계는 불투명한 시장상황에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산업분야에서 미국업계와 한국, 일본업계가 서로 상반되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적인 해답은 「반도체산업의 구조적 차이」 즉, D램 의존도에서 찾을 수 있으나 이것만이 전부라고는 할 수 없다.
미 반도체공업회(SIA)는 최근 지난 5월의 세계반도체출하액이 올해들어 처음으로 전년동월대비 플라스 성장을 기록했다고 발표하면서 『반도체수요가 본격적인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 일본, 대만업계의 주요 제품인 D램시장은 큰 회복세를 보이지 못한 채 6월들어 다시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
이 때문에 비메모리분야에 주력하고 있는 미국업계와 메모리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업계는 같은 절대온도 속에서도 체감온도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현재의 반도체시황은 메모리 비중이 낮은 체질이 적응하기 쉬운 구조로 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메모리분야 최대업체인 한국과 본격 육성에 들어간 대만이 느끼는 어려움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국 반도체업계의 함박 웃음을 꼭 비메모리 중심의 산업 구조 때문으로 몰아갈 수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일본반도체업계에 「마이크론 쇼크」라는 단어가 유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마이크론」이란 미일반도체협상 당시 정치논리를 이용해 마지막까지 일본반도체업계를 괴롭혔던 미국의 D램 전문업체 마이크론 테크놀로지社를 의미하는 것. 그러나 일본업계가 최근 받고 있는 충격은 지난 날과 같은 정치논리 때문이 아니다. 그 충격은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사의 틈새 기술 활용 시장 공략과 시장 생리를 이용한 마케팅 전략에 근거한다.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사가 현재 시장에 출하하고 있는 16MD램의 칩크기는 한국과 일본업체보다 약 30% 정도 작다. 이는 마이크론이 현존하는 차세대 활용 기술을 현 세대 D램에 적절히 구사한 때문으로, 마이크론은 이를 통해 16MD램 칩의 공장 출하 원가를 크게 줄였다. 한국과 일본업체 칩이 개당 5-6달러인데 반해 이 업체 칩 가격은 3-4달러 수준이다. 1센트의 차이가 시황을 좌우하는 D램사업에서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와 한, 일업체들의 원가 차이는 「상대가 안될 정도로 크다」는 게 일본 반도체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사의 시장 생리를 이용한 마케팅 전략도 특별하다. 일본 반도체업계는 지난 2월 회복세를 보이던 메모리 가격이 5월 이후 다시 떨어지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을 마이크론의 움직임에서 찾고 있다. 이 회사는 한, 일업체들이 감산을 표명한 올해 초부터 역으로 증산을 추진, 현재 월 3천만개가 넘는 16MD램을 생산하고 있다. 세계 D램업계 차원에서는 자칫 불협화음을 초래할 수 있는 행위이지만 한 업체 차원에서는 매우 성공적인 마케팅 전략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덤핑문제 등으로 마이크론을 「정치논리 뿐인 기업」이라고 비난해 온 한일반도체업계는 이 업체에 또 다시 한방 얻어 맞은 꼴이 됐다.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사의 이같은 전략에 자극된 일본업계도 한국업체들의 시황회복을 위한 동시 감산 요청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한국 업계가 지난 8일 감산을 표명하자 12일 곧바로 현행 생산규모를 유지할 계획이라고 발표하고 나섰다. 일본업체들은 그 이유로 「이미 적정 수준까지 생산규모를 줄여 놓고 있어 더 이상의 감산은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그 내면에는 전체적인 시장경기의 회복보다는 자사의 이익유지를 우선하는 기업마인드가 깔려 있다.
「미국 맑음, 아시아 흐림」의 가장 큰 원인은 역시 메모리시장 전망의 불투명함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최근 한국과 일본 반도체업계는 비메모리분야 사업 육성에 전력 투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세계 최대 D램 생산국이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만큼 현재 추진하고 있는 「탈D램」 전략의 가시적인 성과를 단기간에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반도체 선진국들의 일반적인 추세인 로직사업으로의 전환은 강력히 추진하되 현재 보유하고 있는 D램분야 기술과 설비를 최대한 활용하는 시장 전략을 구사해 이 분야의 사업성을 극대화해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심규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