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해외 전자산업 새물결 (11);표준을 잡아라 (6)

<고선명TV>

고선명TV(HDTV) 개발은 70년대 들어 시작됐다. 기존 TV의 낮은 해상도를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는가 라는 과제가 고선명TV 개념을 끌어냈다. 초기 고선명TV 표준경쟁은 새로운 TV 전송방식 경쟁이었다.

고선명TV 개발에 처음 나선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은 NHK를 중심으로 10억달러를 투입, 84년 「하이비전」이라는 일본방식의 고선명TV를 내놓았다. 이 TV는 88년 서울올림픽에서 중계방송용으로 사용해 주목을 끌기도 했다. 유럽에서도 지난 86년 출발한 유레카95를 시점으로 고선명TV 개발이 추진됐다.

그러나 이들 2개 지역 고선명TV 개발은 모두 아날로그방식 전송기술을 이용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디지털 시대가 열리면서 고선명TV는 단순한 영상 기기가 아니라 멀티미디어 기기 역할이 부가됐고 따라서 영상 압축 신장에 한계가 있는 아날로그 전송방식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이같은 변화를 재빠르게 읽고 디지털 방식 고선명TV를 지난 90년 말 발표한 것은 미국 제너럴 인스트루먼츠(GI)였다. 이후 고어 부통령이 정보고속도로를 발표했고 영상정보화, TV와 컴퓨터 융합 등이 새로운 발전 방향으로 제시됐다. 이로 인해 디지털방식을 제시한 미국 업계가 뒤늦게 고선명TV 표준경쟁에 뛰어들어 일거에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게 됐다.

이후 94년 유럽의 경우 96년 말을 시한으로 10개국이 참여하는 첨단디지털 TV기술 개발 프로젝트(ADTT)가 구성돼 본격적인 디지털방식 개발에 들어갔다. 이를 통해 디지털비디오방송(DVB) 전송표준이 마련됐고 유럽내 대부분의 국가들이 이를 표준으로 받아들였다. 또 1백60 단체 및 연구기관이 참여하고 있는 디지털AV협의회(DAVIC)에서 상당 부분을 수용, 표준경쟁의 한축을 형성하게 됐다.

한편, 일본은 86년 세계방송관계회의에서 하이비전 방식을 세계 고선명TV방송 표준으로 하자는 제안이 먹혀들지 않자 독자적인 행보를 통해 하이비전을 실용화했다. 이 방식의 고선명TV는 TV시스템뿐으로서만 아니라 영화, 교육, 예술, 출판 등에서 탁월한 응용성을 입증, 미래가 밝은 것으로 자체 평가하고 있다. 보급형기기가 개발돼고 95년 이후 방송이 시작되면서 자국내 시장도 크게 활성화되고 있다. 그렇다고 일본이 세계적인 추세인 디지털방식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일본 우정성은 2000년대 초까지 아날로그방식을 디지털방식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업계 역시 디지털방식에 대한 대비, 마쓰시타의 경우 미국에서 고선명TV가 출시되면 즉각 제품을 출시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

미국과 유럽과 일본 등 3개 지역에서 이처럼 독자적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은 고선명TV가 본격적으로 상용화됐을 때 나타날 엄청난 시장에서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파워게임으로 볼 수 있다. 최근까지의 결과를 놓고 볼 때 방송방식 표준에서 미국이 주도권을 쥐고 있고 유럽은 자체 수요 전제로 나름대로 입지를 마련해나가고 있는 형세다. 아날로그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일본은 외형적으로 완패를 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세좋게 내닫던 미국의 고선명TV 사업이 난조를 보이고 있다. 표준에 또다른 걸림돌이 생겼기 때문이다. GI, AT&T 등의 기업연합이 만든 통일규격안을 지난해 5월 미 연방통신위원회(FCC)가 발표하자 마이크로소프트(MS), 애플 등 PC업체가 반발하고 나서면서 TV업계 발목을 잡아버렸다. 고선명TV와 PC의 영상표시방식 차이에 따른 문제를 PC 업체들이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여기에 방송업계에서 고선명TV 방송장비 개발 어려움을 들어 프로그램 제공을 연기함에 따라 고선명TV 출시 일정도 1년 정도 늦어지게 하면서 전반적인 일정에 차질이 빚어졌다. 이제는 TV만의 문제가 아닌 게 돼 버렸다.

지금 상태라면 미국 고선명TV 방송은 99년에 시험방송이 시작돼 2000년에 가서야 본격적인 서비스가 시작될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의 뒷걸음질은 일본과 유럽에 또다른 기회를 부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HDTV 경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일반적 시각이다.

<박주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