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통신 업체들은 미국 퀄컴사의 봉인가』
이번 미국 퀄컴사의 기술사용료 재인상 요구는 원천기술을 한 업체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국내 CDMA 4사(맥슨전자 포함)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5천만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로얄티를 이미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등록한 특허를 근거로 추가 지불을 요구하는 「횡포」를 부릴 수 있는 것은 한국 기업들이 퀄컴의 특허를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퀄컴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퀄컴은 미국 현지에서는 이런 저런 업체로 부터 특허권과 관련한 시비를 끊임없이 제기당하고 있으며 일부 특허권은 상실할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도 한국에서는 요지부동의 고압적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퀄컴은 이미 삼성전자, 현대전자, LG정보통신 등 CDMA 시스템 3사에게 75만달러의 기술 사용료 인상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국내업체들은 퀄컴이 신규로 제기한 1백여건의 특허가 실효성이 지니고 있는 지를 검토하고 있으며 조만간 이에 대한 입장을 발표할 예정이다.
하지만 75만달러라는 구체적인 액수를 명시하고 한달간의 협상기간을 이미 설정한 상태에서 사실상 이를 피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75만달러라는 금액이 어떤 근거로 산출됐는 지에 대해서도 업계는 아직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 상황이며 퀄컴과의 피곤한 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부르는 대로 줘야하는 입장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CDMA기술 도입을 주도한 정부와 ETRI는 이를 「업체 당사자의 문제」로 여기고 있다. 국내 제조업체들만 속앓이를 하고 있는 형편이다.
사실 퀄컴과의 일련의 마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95년도에 시스템과 단말기에 채용되는 칩과 소프트웨어의 공급 기간을 제때에 맞추지 못해 국내 업체들이 어려움을 겪은 바 있다.
당시에도 퀄컴이 분명 계약조건을 어겼음에도 국내업체들이 강력하게 제기하지 못한 이면에는 CDMA기술에 대해서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번 경우도 사정은 다르지만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마찬가지 상황이다. 원천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현실에서 국내 CDMA 상용화라는 성과가 얼마나 실속이 없는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국내 업체들이 퀄컴의 이같은 특허권 횡포에 대처하기 위해 최근 광대역 CDMA 개발방식으로 퀄컴방식 이어 일본 NTT도코모방식을 채택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퀄컴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기에는 역부족인 실정이다.
오히려 CDMA방식으로 서비스를 제공할 PCS3사의 상용 서비스 경쟁과 이에 따른 단말기 파동, 단말기 시장을 겨냥한 국내 업체들의 CDMA기술도입 붐 등 일련의 상황은 국내업체들의 입지를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이미 직접적으로 퀄컴과 계약한 업체는 기존 4개사에 최근 4개업체가 가세해 8개업체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다른 국내업체들도 CDMA기술 도입을 위해 부지런히 미국과 한국을 오가고 있어 이런 상황은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결국 칼자루를 쥐고 있는 퀄컴과 초기에 첫단추를 잘못 낀 정부와 ETRI, 그리고 지나친 과열경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국내 제조업체의 단견이 맞물려 국내 업체의 입지는 쉽게 개선되지 않을 전망이다.
<강병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