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남, 북한간 협력의 물꼬가 트이고 있다. 북한 신포의 경수로 건설공사와 나진, 선봉지역 개발에 우리의 기술 및 자본이 투입됐다. 특히 분단 반세기만에 신포 지역과 국내 정부기관을 직접 연결하는 전화선이 개설된 것은 그 의미가 크다.
이런 가운데 전자신문사 부설 통일정보통신연구소는 본지 창간 15주년을 기념하여 22일 파울 라우프스(Paul Laufs) 독일연방 우전부 정무차관을 초청, 독일통일 당시 정보통신분야 정책수립 및 시행과정을 생생하게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통일독일의 정보통신 통합과정과 과제」를 주제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이번 특별강연회에서 라우프스 차관은 독일통일의 경험을 빌려 통일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닥칠 수 있으며 이에 대비해 북한의 통신인프라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연내용을 요약 정리한다.
<편집자>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침묵의 벽」의 종말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동독정부는 서독과의 전화통신을 국제통신으로 간주했으며 그나마 크게 규제하는 상황이었다. 통일 전까지 동, 서독을 연결하는 전화선은 6백90여회선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동독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통일후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이 회선 증대였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었다. 독일연방은 이에 따라 동독지역의 통신기술 수준에 대한 평가작업에 돌입했다. 통일직후 서독의 도이치분데스포스트텔레콤(DBT)이 동독 전화망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89년부터 90년 10월 통일을 이룬 2년까지 동독의 전화보급률은 1백가구당 11회선(1백명당 7회선)으로 서독의 1백가구당 92회선(1백명당 42회선)에 비해 훨씬 떨어지는 수치였다. 인구 1천7백만명에 할당된 총회선수는 1백80만개로 서독의 6천4백만명에 2천9백회선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온라인서비스의 전신인 비디오텍스 서비스는 찾아볼 수 없었고 극히 제한된 데이터통신서비스만이 제공되는 상태였다. 지역망의 경우 사용시간 측정을 위한 기술설비조차 미비했다. 노후된 기술을 사용함에 따라 전송음질이 나빴으며 망 자체도 신호간섭에 취약한 상황이었다. 국제가입자 중계 다이얼서비스는 제한적으로 허용됐으며 수동교환전화호출의 대기시간은 최대 10시간이나 됐다.
지방 교환시스템의 경우 전체의 70%는 25~60년 동안 교체된 적이 없었으며 70년 동안 사용된 것도 23%나 됐다. 전화신청 대기 건수는 1백50만건이었고 동독 국민들은 20년이란 대기기간 때문에 아예 신청을 포기할 정도였다.
통일로 인해 동독인들의 통신서비스에 대한 욕구가 봇물 터지듯 분출됐던 것은 당연했다. 특히 동서독간 전화통신 욕구는 급속히 늘어나 DBT는 최단시간 내에 통일독일의 통신인프라를 향상시켜야 하는 엄청난 부담을 떠안게 됐다.
베를린장벽 붕괴 직후 동서독은 우전부 장관회의를 통해 최초의 종합 통신인프라 구축 프로젝트 「텔레콤 2000」을 마련했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물론 구 동독지역의 경제부흥과 독일통일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통일정부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통일원년인 90년부터 97년까지 구 동독지역에 5백70만개의 전화회선, 공중전화, 카드전화 7만대, 텔레팩스단말기 40만대, 데이터터미널 9만대, 케이블TV 5백만대 등을 신규로 설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프로그램에 소요되는 비용은 총 6백억마르크로 90년 당시 달러로 환산하면 약 4백억달러 정도였다.
이같은 대규모 작업의 실무를 담당했던 DBT는 파트너십 프로그램을 통해 자사 직원 3천여명을 투입, 동독지역의 통신분야 기술자들을 교육시키는 작업에 나섰다. 급증하는 통신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DBT는 지역을 구분해 일반 계약업체들에게 할당, 해당 지역의 통신인프라 구축계획 수립부터 가입자 전화기 제공에 이르는 모든 작업을 이들이 수행하도록 위임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이같은 DBT의 노력은 서독이 지난 89년 우정전기통신부문을 개혁해 이동통신 및 위성통신 시장을 개방한 결과 탄생한 민간 이동, 위성통신 사업자들에 의해 가속화했다.
DBT가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한 것은 지난 91년부터. DBT는 우선 아날로그 장거리 네트워크 위에 고도의 현대적인 디지털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해 총연장 4천4백㎞의 광케이블을 구동독지역에 매설하는 등 단계별로 낡은 전화망을 현대화해 나갔다. 지난 96년까지 1백42개 지역전화국이 모두 디지털화됐으며 다수의 전략거점을 네트워크로 연결했다. 이에 따라 구동독 통신망의 디지털화는 99%에 달하게 됐다.
DBT는 이와 함께 하나의 독일전화망을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DBT는 3년여 기간 동독지역이 독일 지역코드 체계를 채택하도록 유도했으며 92년에는 15만회선을 교환기를 통해 연결하고 도시코드를 통합함으로써 동, 서독의 마지막 「통신장벽」을 허물었다. 92년 8월31일과 9월1일 사이 동서 베를린의 1백80만회선이 단일코드와 동일요율을 적용받게 됐으며 가입자번호도 바뀌었다.
이같은 작업의 결과로 93년말에 이르러 드디어 하나의 독일 통신망이 구축됐다. 통일 당시 1백50만건이었던 전화신청 대기자수가 92년 2백20만으로 증가했으나 96년에 이르러 47만5천건으로 대폭 감소했다. 올해 말이면 수요가 모두 충족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화망 확충이 어려운 지역은 공중전화를 가설했다. 구식 공중전화를 현대화하거나 교체하고 장거리전화 기능도 제공했다.
이동통신 분야에서는 통일직후 C-네트워크를 통해 전화서비스의 병목현상을 해소했다. 92년 C-네트워크를 전역으로 확대했으며 93년 말에 가서는 디지털 GSM 표준에 입각한 D-네트워크를 전국에 구축했다.
올해초 한 개의 망을 허가함으로써 현재 동독지역에는 총 4개의 이동통신 네트워크가 존재하고 있으며 이 지역 무선이동통신 이용자수는 1백만명을 돌파했다.
공영방송사의 TV 프로그램을 신속히 제공하기 위해 고용량의 TV 송신장치를 설치하였고 대도시와 산업지역에 20개의 지방 TV 송신장치를 설치, 민간 프로그램공급자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한 것도 DBT가 벌인 작업중의 하나다. 라디오의 경우 음성방송의 지방분산을 목적으로 주 단위로 VHF 네트워크를 구축하게 했다.
통일직후 작성된 개발프로그램에 맞춰 DBT는 4백40만 가정이 케이블TV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했으며 그 3분의 2 수준인 3백만명 정도가 실제로 케이블TV를 시청하고 있다. T-온라인 서비스 이용자도 현재 20만명을 넘어서 목표치를 초과달성한 상태다.
구동독의 통신인프라는 거의 7년여의 작업을 거쳐 미운오리새끼에서 화려한 백조로 변신하게 됐다. 구동독 통신인프라의 발전은 경제, 행정 및 사회적인 측면에서 그 의의를 가늠해볼 수 있다.
새로운 통신인프라는 우선 경제적으로 비즈니스 분야의 발전과 아이디어의 도출, 서비스 제공 및 신규고용 창출 효과를 낳았다. 자주적인 시장메카니즘을 정치적인 위협으로 간주하여 배척하는 데 익숙했던 구 동독지역 시민들은 지역사회가 그 기능을 원활히 수행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는 통신인프라라는 것을 경험으로 깨닫게 됐다.
내외부를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통신인프라는 주 정부의 행정을 크게 합리화시켜 효율성과 비용효과를 증대시켰다. 동서독 쌍둥이마을간 구축된 특별교환회선은 구 동독의 행정민주화를 앞당겼으며 일부 행정프로세스를 공동으로 처리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통신인프라는 때로는 생명을 구해주기도 하는 전화를 계속 사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각 개인에게 복지에 대한 개념을 주입할 수 있었으며 생활의 질을 현저하게 향상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통신인프라 신축은 새로운 행정구조 수립을 수반했으며, 이는 서독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서독의 공무원을 동독으로 파견, 관료주의를 없애고 행정문제에 대한 지식을 전수하는 한편 행정기관과 우정통신업체들의 관리부문이 기능적인 수직계열화를 이룰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을 제공했다.
통일독일의 경험은 올바른 기능을 수행하는 행정기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명확한 수직적 행정구조 및 투명한 업무처리절차가 신속하고 비관료적인 의사결정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통신인프라의 환골탈태를 지향하는 각 분야의 작업이 순탄하지 만은 않았다. 특히 동독의 정치적인 고립으로 인해 미처 예측하지 못하고 현지에 가서야 확인할 수 있었던 문제점들은 상당히 심각했다.
전화선의 노후 및 계획적이지 못했던 케이블 매설, 폭풍 때마다 범람하는 홍수에 갇혀버리는 케이블 매설지역, 지방공무원과 정치가들의 과중한 업무, 주민들의 비현실적인 기대 등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난제들이었다.
그러나 단기간에 해결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이러한 문제점들도 열린 마음으로 유연하고 창의적으로 대처할 때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7년의 기간이 통일독일에게 준 커다란 교훈이었다.
<정리=이일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