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미는 다시 한 번 전화기의 송수화기를 들어보았다. 무반응.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혜경씨, 아직도 불통이야.』
『그래? 할 수 없지, 뭐.』
『그래도 그렇지. 시부모 될 사람하고 약속해 놓고 전화고장으로 연락할 수가 없으니 속상하지.』
『땅속에서 저렇게 큰불이 났는데 전화가 바로 수리되지는 않을 거야. 내일 연락 오겠지.』
『혜경씨는 그 친구 집 몰라?』
『몰라. 혼자 사는 남자 집을 알아서 뭐하니.』
『그래도 남자친구 부모까지 만나볼 형편이면 집에도 가고 해야 되는 것 아니니?』
『나도 그렇고, 승민씨도 혼자 사니까 서로 부담스러워. 결혼하면 한집에서 살텐데, 뭐.』
『다들 갔지?』
『응, 다들 퇴근했어. 마감은 내일하기로 하고 다들 퇴근했어. 박 대리만 남아 있을 거야. 무인경비시스템이 오프라인으로 되었대.』
『오프라인? 혜경씨, 전화선이 끊기면 단말기도 오프라인으로 되고, 무인경비시스템도 오프라인으로 되는가 보지?』
『그래, 광화문 네거리 맨홀에서 발생한 화재로 전화선이 다 타버려서 전화도 고장이고, 전산시스템도 오프라인으로 되었대. 무인경비시스템도 마찬가지로 오프라인으로 되었대.』
『그래서 박 대리가 은행 지키려고 남아 있구나?』
『응.』
『불은 이제 아주 꺼졌나 보지?』
『그래. 이젠 연기도 나지 않아.』
현미는 창문을 통해 마주보이는 화재현장을 바라보았다.
차량에 설치된 발전기가 윙윙 돌아가고, 전등불이 주변을 대낮처럼 밝히고 있었다.
불꽃과 연기가 솟구치던 맨홀에서는 이제 불을 끄기 위해 쏟아부었던 물을 뽑아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대형 양수기 여러 대가 맨홀 구멍에 호스를 박고 물을 뿜어올리고 있었다.
도로 한복판에는 사람 키보다도 더 큰 케이블 드럼이 줄줄이 놓여 있고, 작업복을 입은 통신회사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현미는 불현듯 형부을 떠올랐다. 우리나라의 전체 통신망을 관리하는 통제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형부. 평상시에도 고장이 발생하면 밤낮없이 출근해야 하고,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형부였다.
현미는 무의식적으로 전화기의 송수화기를 들었다.
무반응.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