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279)

디주리두 소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혜경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 말리면서도 눈을 감았다. 호주. 골든코스트의 그 길고 긴 해변이 떠올랐다. 푹푹 발이 빠지던 부드러운 모래와 상큼한 바람, 그 바람을 타고 들려오던 디주리두 소리.

혜경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찬물로 온몸을 식혔지만 몸은 더욱 달아올라 있었다.

뿌아아아아-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을 그대로 끄집어내는 소리였다. 수만년 역사를 들춰내는 소리였다. 인간이 이 땅에 살아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존재하던 온갖 상념을 불러내는 소리였다. 충동의 소리였다.

숨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긴 통나무 안에 가둔 채 인간의 호흡기와 통나무의 빈 공간을 하나로 하여 내는 디주리두 소리. 혜경은 당시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오른 블루마운틴 정상에서 그 소리를 처음 들었다. 우연히 동행하게 된 환철과 함께였다.

우연. 혜경은 아직도 환철과 함께 떠났던 그 여행을 우연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랬다. 혜경에게는 아직도 우연이었다. 웹 형태의 PC통신 서비스의 이벤트 행사에 참여하여 호주 여행권에 당첨돼 함께 여행을 떠날 수 있다는 것까지는 우연일 수 있었다. 제주도 여행 때처럼 같은 자리를 바로 옆으로 배정받을 수 있었던 것도 우연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우연은 혜경에게만 우연일 뿐이었다. 그러나 혜경도 느끼고 있었다. 확인이 필요하지 않을 뿐이다.

오늘밤 환철을 다시 끌어들인다 해도 혜경에게는 우연일 뿐이다.

겨우 물기가 가신 머리칼을 풀어헤친 채 혜경은 전화기의 송수화기를 집어들었다.

무응답.

호출음이 계속 이어졌지만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혜경은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어디 갔을까? 지금이라도 승민과 전화가 연결된다면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송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매끄럽게 뻗은 굴곡진 몸이 거울에 비쳤다. 몸이 주뼛주뼛거렸다. 소름이 돋는 듯했다.

아,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오늘도 기어코 환철을 불러내야 하는가.

혜경은 다시 한번 짧은 신음소리를 냈다. 맨홀에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어도, 전화가 고장이 아니더라도 지금과 같은 갈등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혜경은 가운을 벗었다. 뽀얀 우유빛의 풍만하고 팽팽한 몸이 드러났다.

눈을 감았다.

정말 오늘도 어쩔 수 없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