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맨홀 (282)

충분했다.

혜경에게 남자는 환철 하나로 충분했다.

남자를 알게 한 것도 환철이었지만 다른 남자와의 또다른 경험을 차단한 것도 환철이었다.

프로메테우스의 간이 자라기를 기다리는 독수리처럼 환철은 늘 혜경의 육체에 불이 붙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그만 틈도 없이 혜경이 원할 때 언제든 다가와주었다. 그만큼 환철은 혜경에게 다른 남자의 필요성을 느낄 기회를 주지 않았다.

마우스 커서의 날카로운 화살표가 오프라인이라는 글자 위에서 계속 대기하고 있었다. 어떤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듯했다.

결단.

하지만 혜경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혜경이 아니라 혜경의 육체였다. 다만 망설일 뿐이다.

이제 촛불을 켜지 말자고, 이젠 벗어나자고 그토록 애를 썼지만 결국 오늘도 다시 촛불을 켜야 하는가.

혜경은 오프라인을 온라인으로 바꿔 환철을 불러내릴 때마다 프로메테우스의 독수리 그림 아래 촛불을 켜 놓았다. 자유스럽게, 임의롭게 타오르는 불꽃. 그것은 환상이었다. 하지만 고독이었다. 육체는 환철의 몸과 함께 엉켜 있어도 정신은 고독이었다. 혜경에게는 그랬다. 임의롭지만 동화될 수 없는 것이 촛불이었다.

촛불은 처음부터 저 혼자서 타며 스스로 연료를 마련한다. 초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고독하게 같은 불꽃으로 탄다. 촛불은 환상이다. 과거의 추억을 되살려준다. 그리하여 상상력과 기억력이 일치하는 세계로 의식을 이끌어 간다.

촛불은 혜경으로 하여금 늘 환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했다. 불꽃은 평상적인 세계로부터 이성을 떼어놓고, 환상의 세계를 확대시킨다. 불꽃. 너울너울 춤추는 불꽃은 환상. 그 환상은 사람의 몸도 함께 태운다. 추억을 일깨우고, 추억은 또다른 추억을 불러온다. 그 추억은 불꽃을 타고 구체적인 육체의 감각을 지배한다.

일반적으로 불이 다른 것과 융합하려고 하는 데 반해 촛불은 결코 합치려고 하지 않는다. 혼자 타면서 혼자 꿈꾸며 사라진다. 이것은 인간 본래의 모습 그 자체다.

뿌요요요요- 디주리두 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혜경은 오프라인을 가리키고 있는 마우스 커서의 화살표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환철은 프로메테우스의 간이 자라기를 기다리는 독수리처럼 다가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