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과학기술계에서는 우리나라 과학기술 개발정책과 관련하여 중간기술이라고 칭하는 미디엄테크 개발을 위해 집중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는 과학기술처 장관의 발언을 둘러싸고 치열한 격론이 벌어진 적이 있다. 하이테크 투자를 강화해야 하는 첨단정보시대에 정부가 오히려 중간기술의 개발 및 투자를 강조한 것은 패배주의적인 발상이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결국 이같은 지적에 따라 정부의 미디엄테크 사업은 사업 1차년도를 종료한 이후 국가 과학기술정책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과학기술계 일각에서는 기반기술을 무시하고 하이테크 부문만을 지향하고 있는 국가기술개발정책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표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 이른바 백색가전제품이 위기를 맞고 있는 국내 전자산업의 수출효자 품목으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리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백색가전산업이 그동안 수출확대의 한계를 크게 극복하지 못한 채 단순한 내수용 제품으로 전락해버린 사양산업으로 인식되어 왔다는 점에서 최근의 백색가전 수출확대는 더욱 의미있는 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국산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이 중국, 동남아 등 후진국에서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유럽, 러시아 등 선진국으로 수출이 크게 늘고 있다. 특히 선진국으로 수출되는 국산 가전제품은 대형 및 고가제품으로 한국산은 저가의 보급형 제품이라는 보편적인 인식을 완전히 씻어내며 세계 제2의 가전생산국으로서 한국의 명성을 다시 한 번 전세계에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삼성전자의 청소기는 블루밍데일즈 등 미국 동부지역 최고수준의 백화점 및 타겟 등 전문양판점을 중심으로 미국 후버 등 경쟁업체 제품에 비해 고가로 팔리고 있으며 전자레인지는 가전제품 수출 역사상 올해 처음으로 미국 시장에서의 점유율을 10%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으로 삼성 측은 전망하고 있다. 대우전자의 가전제품 수출도 매년 25% 이상 성장하고 있으며 특히 백색가전의 경우 이보다 훨씬 웃도는 연평균 40% 가까운 성장세를 나타내고 있다. 가전전문업체를 표방하고 있는 대우는 이같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 TV, VCR 등 5대 가전제품에서 세계 제1의 생산업체로 도약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워 놓고 있다.
이처럼 국산 백색가전제품의 수출이 급증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국산 백색가전제품이 외국 현지업체에서 생산된 제품에 비해 경쟁력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가전업체들은 그간 내수시장에서의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치열한 기술경쟁을 벌여 왔으며 이것이 바로 국산 백색가전제품을 세계 최고수준까지 오르게 한 것이다. 소음없이 강력한 냉기를 내보낼 수 있는 에어컨, 저소음에 강력한 흡입력을 자랑하는 청소기, 냉장력이 우수하고 사용하기 간편하게 설계된 냉장고 등 다양한 제품의 고유특성을 강화시킬 수 있는 미디엄테크 즉 첨단이 아닌 핵심기반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제품에 적용한 결과인 셈이다.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분야는 정보통신 등 하이테크산업만이 가능하다는 국내 전자업체들의 보편적인 인식이 전환해야 한다는 점을 바로 최근 백색가전제품의 예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첨단분야의 기술과 상품이 앞으로 다가올 치열한 경쟁시대에서 경쟁력을 담보할 수는 없는 것은 자명하다. 이에 비해 가전분야는 나름대로 기술개발과 투자를 계속 이어간다면 선진국과의 기술경쟁에서 한 발 앞선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기반기술에 충실한 제품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서 하이테크만을 지향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과 발상의 전환으로 새로운 기술개발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이다. 제품 본연의 기능을 한 차원 높일 수 있는 핵심기반기술 즉 미디엄테크 기술개발에 관심을 지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