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한우물" 파는 중견부품업체의 교훈

중소기업 하면 자금부족이라는 등식이 연상되는 것이 통례다. 그러나 최근 보도에 따르면 D전자를 비롯한 5개 중소, 중견 전자업체는 부채 비율이 낮기 때문에 금융비용 부담이 적어 견실하게 기업을 경영하고 있어 화제라고 한다. 특히 이 업체들은 종업원이 그리 많지 않으면서도 세계시장 점유율이 2~5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놀라운 소식이다. 커넥터, 인쇄회로기판(PCB), 전해콘덴서, 수정진동자 등을 생산하는 이들 업체의 공통된 특징은 한 우물만을 팠다는 점이다. 생산품목을 이것저것으로 옮기지 않고 한 품목에만 연구를 거듭해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쌓은 것이다. 이들은 해외로부터 기술력을 인정받아 총 매출의 65~94%까지를 수출하고 있다고 전한다.

요즘 달러가 부족해 우리나라가 금융위기에 처하고 보니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다들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위의 중소, 중견 전자업체들은 소망스럽기 그지없다. 최근 기업체들은 대소를 막론하고 돈줄이 막힐 대로 막혀 줄줄이 부도가 난다. 올해 한보를 시작으로 태일정밀 등 굵직한 기업도 수없이 쓰러졌다. 중소기업 부도는 무려 5만건을 넘었다.

상황이 어렵다 보니 어떤 대기업은 직원을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하는가 하면 국내 대표적인 그룹은 조직의 30%를 줄이겠다고 공언했다. 그렇지 않아도 실업문제는 심각한데 이대로 간다면 내년의 실업자는 1백만명을 훨씬 웃돌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조직 축소나 인력 절감은 분명 비용을 줄여 어려움에 처한 기업에 단기적으로는 도움은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앞에서 본 중소, 중견 업체들도 인력 감원으로 좋은 경영 실적을 올린 것은 아니다.

현재 기업체들이 어려움에 처하게 된 원인 분석은 다양하다. 국가경제나 산업이 총체적으로 위기에 처했으니 만치 그 원인도 수없이 많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구조조정 시기를 놓쳤다는 점이다. 지난 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미국과 일본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그런데 우리는 당시 「3저」 등으로 호황을 구가하면서도 구조조정을 등한시했다. 미국과 일본이 양의 경영에서 벗어나 질의 경영에 눈을 돌려 경영의 초점을 수익에 둘 때에도 우리 기업은 차입 경영으로 무리하게 회사를 키우고 사업 품목을 늘리는데 주력했다.

그러한 업체들이 이제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감원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하고 있다. 조직을 크게 줄이거나 대량으로 감원할 수 있는 조직이라면 그 자체가 이미 큰 문제를 안고 있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앞으로 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기업의 대량 감원으로 인한 문제는 기업의 인적 손실을 초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것은 개별 기업의 손실뿐 아니라 산업 전체가 부실해 질 수밖에 없다.

그것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사회 구성원의 아노미 현상이다.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사회 전체에 확산돼 산업이나 기업조직의 활력을 빼앗아가고 있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나라의 간판 산업인 전자산업도 장래를 장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현재 국내산업이 처한 위기에 대한 대책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이 어렵다고 해서 극단적인 방법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허둥대지 않는 냉정함이 필요하다. 이제부터라도 회사의 특성이나 규모에 맞는 대응책 수립 기회를 놓친다면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떨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기술지상주의로 전문성을 키워 오늘날 심각한 상황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몇몇 중소, 중견 기업들로부터 겸허하게 배워야 겠다.